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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의 아름다운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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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남 100년 인재’의 출현을 맞으며...

작성일09-10-21 17:47 조회4,7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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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100년 인재’의 출현을 맞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 당시 “박 수석(박주선 법무비서관을 늘 이렇게 불렀다) 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고 극찬했던 말이 언론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유명하다. DJ는 절대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또한 누구를 각별히 지지하는 일도 없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박주선을 극찬하고 나서서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는 표현은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문구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 DJ는 이미 박주선의 큰 인물됨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DJ는 자신의 못다 이룬 뜻을 계승 발전 시킬만한 인재를 이제야 찾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2005년  5월에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자마자 인사차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박주선에게 DJ가“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묻자 “차분히 생각해야겠지만 정치를 떠날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DJ는 “호남에 인물이 없는데 정치권에 남아 큰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며 정계은퇴를 적극 만류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는 등 ‘박주선에 대한 DJ의 기대’가 얼마나 큰 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그런 인간 박주선에게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라는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인권탄압이 가해진 것이다. 말이 인권탄압이지 ‘보복 표적수사에 의한 정치탄압’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 인간에게 가해진 시련이 이토록 가혹할 수 있을까?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누가, 왜 《박주선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었던가? 저자는 20여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정·관계, 경제계의 수많은 거물급 인사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풀스토리를 접해 왔다. 그러나 박주선 전 의원의 삶은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극과 극의 인간 체험 수기에 다름 아니다. 수많은 기자들과 언론들이 그를 취재하고 보도했다. 그러나 모두 단편적인 편린(片鱗)들에 불과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몇 줄의 기사로 혹은 몇 쪽의 지면에 옮겨 놓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박주선’을 가까이서 함께하면서 줄곧 지켜 봐온 저자는 그에게 가해진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어떤 형태로 든 기록으로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삶의 줄거리나마 엮을 수 있었다. 결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온갖 폭압을 이겨 내려는 그의 결연한 의지와 처절한 몸부림, 그 발자취 하나하나가 숨 막히는 감동이요 인고(忍苦)의 눈물이었다. ‘눈물로 쓴 박주선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못다 한 그의 이야기는 눈물 속에 녹아 파란 하늘에 띄워 두었다. 하늘이 내린 시련이었고 또 그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피는 인동초(忍冬草)’의 내용을 개정 증보하여 ‘박주선의 아름다운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여 ‘인간 박주선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새롭게 재조명 했다. 앞으로 그에게 어떠한 시련과 영광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맹자는 “큰 일을 할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시련을 내린다”고 했다. 이제 그에게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모아져 있다고 확신한다. ‘박주선의 힘’이 ‘호남의 힘’으로 ‘7천만 겨레와 한반도의 힘’으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하자. 2008년 1월 그는 무등의 태양으로 다시 솟구쳤다. ‘호남 100년 인재’의 출현에 희망의 맥박이 고동친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했던 그가 어떤 모습으로 호남과 민족의 역사 앞에 다시 서게 될지 우리 모두 함께 ‘박주선의 아름다운 부활을’ 기대해 본다.

2008년 1월

박주선의 ‘아름다운 부활’을 기다리며...

책머리에 _ 4


제1부 호남 100년인재의 출현을 맞으며…

호남 100년 인재 - 역사 앞에 다시 선 박주선

‘아름다운 부활’을 꿈꾸며...

서울시장 후보로 두 번째 호남과 민주당의 순교자가 된 박주선

전남지사를 포기하고 당의 명령을 따르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의 중심에 서서...

광주여! 무등산이여!

호남의 심장 광주의 부활을 외치며...

 

제2부 마음 따뜻한 명검사 박주선(朴柱宣)

찢어지게 가난한 토담집서 수재(秀才)의 꿈은 영글고...

행상 어머니생각 “불쌍한 사람 돕겠다” 검사의 꿈 키워

서울 전농동 5만원 판자집서 밥푸며 서울대 재수

16회 사법시험 수석합격 - 어머니 가슴에 얼굴 묻고 통곡

초임시절부터 검찰총장감으로 지목 - 청렴, 강직 상징 박주선

이철희·장영자 사건 등

대형사건 수사로 이름 날린 명검사(名檢事) 박주선

구속시킨 피의자도 감복한 ‘마음 따뜻한 검사’ 박주선

땅끝 해남에 심은 ‘동백꽃 사랑’ - ‘동백장학회’를 설립하며...

“DJ 비자금 사건수사 유보” 결정주도 -

김대중 대통령 당선 1등 공신

대통령 법무비서관으로 김대중 정부의

고위직 인사, 사정(司正), 국정개혁(改革) 진두지휘

김대중 대통령의 깊은 신뢰 - “박주선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

“큰 일을 할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시련을 내린다”

“반개혁 세력 음모의 희생양” 된 억울한 박주선

‘무죄판결’로 진실 밝혀진 옷로비 광풍 -

DJ정권 최대의 정치적 희생양 박주선

제3부 사선을 넘어 호남의 희망으로 부활한 박주선(朴柱宣)

‘박주선 살리기’ 나선

화순, 보성인들의 눈물겨운 국회의원 추대운동

16대 국회의원 4.13총선 무소속 당선 신화 -

‘37일간의 감동 드라마’

‘중진급 초선의원’ 박주선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

낙후지역 화순과 보성을 깜짝놀랄 명품 고장으로 만들어낸 박주선

박주선의 약속, 주민의 흐르는 눈물 온몸으로 닦아내다

‘또 다른 신화’ 노무현 대통령 당선과 ‘박주선의 힘’

 

제4부 호남과 민주당의 순교자 박주선

          -박주선 죽이기와 호남 분할지배 음모의 서곡-

민주당 분당(分黨)의 거대한 음모(陰謀) -

박주선을 향한 회유와 압력 “명분없는 분열주의 거부”

제2의 시련기 맞은 ‘호남의 아들’ -

노무현 정권과 ‘박주선 죽이기’ 의혹

‘진실 가둔’ 두 번째, 세 번째 투옥…

‘사선을 넘어’ 꺾이지 않은 박주선의 기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눈물의 옥중출마 4.15 총선


제5부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인권유린 사건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의 참혹한 시련을 이겨낸 호남의 등불-

사법정의 세우기 위해 ‘극단의 길’도 생각했던 ‘의인(義人) 박주선’

‘대법원 무죄판결’ - 하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았다

“가족들 생각하면 피눈물이 쏟아졌다”

박주선의 존재이유 - ‘애끓는 가족애(家族愛)’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인권유린 사건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

“사악한 정치세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자 진실과 양심의 승리”

‘박주선 무죄 후폭풍’ - 정치권 ‘검찰권력 남용’ 맹공

박주선을 향한 ‘거대한 음모의 내막’

‘호남의 순교자 박주선’ 무등산은 알고 있다

 

 제1부

호남 100년인재의 출현을 맞으며…

호남 100년 인재 - 역사 앞에 다시 선 박주선

‘아름다운 부활’을 꿈꾸며...

서울시장 후보로 두 번째 호남과 민주당의 순교자가 된 박주선

전남지사를 포기하고 당의 명령을 따르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의 중심에 서서...

광주여! 무등산이여!

호남의 심장 광주의 부활을 외치며...


호남 100년 인재 - 역사 앞에 다시 선 박주선

‘아름다운 부활’을 꿈꾸며...


“오월 영령들께 누를 끼쳤지만 무죄를 받아 떳떳하고 당당하게 돌아왔다. 이 땅의 바른 정치를 위해 온 몸을 바치겠다. 시도민(市道民)의 부름에 기꺼이 응하겠다.” 2005년 6월 16일 거대한 음모의 폭압을 뚫고 박주선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역사 앞에 다시 섰다. 광주의 역사, 호남의 역사, 민족의 역사 앞에서 ‘아름다운 부활’을 다짐했다.

1년 5개월 여 만에 고향에 돌아온 박주선은 깜짝 놀랐다. 16일 오전 10시 30분 광주공항에 도착하자 수 천 명의 지지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박주선!’을 연호하고 있었다. ‘JS 참사랑’ ‘SUN 클럽’ 등 팬클럽 회원들은 플래카드와 피켓을 흔들며 ‘박주선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전남 도의원과 시·군 지방의원 수십 명도 대거 출동했다. 방송·신문 등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경쟁도 뜨거웠다. “DJ 이후 이렇게 많은 환영 인파가 공항에 몰린 적이 없었다”는 광주 공항 관계자의 말을 언론들이 전했다.


그는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오후에 기자간담회를 갖고 “호남에 인재가 없다고 실망만 하지 말고 인재를 발굴해 키우자”고 ‘호남인재 발굴론’을 역설했다. 오전 5·18 국립묘지 참배시 “이 땅의 바른 정치를 위해 온 몸을 바치겠다”고 이땅의 정치발전을 위한 굳은 각오를 피력했다. 역사 앞에 다시 선 박주선은 ‘아름다운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자신의 선거구였고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화순을 찾았다. 박주선 의원 4년간의 화순은 깜짝 놀라게 변모했다. 지역 언론들은 “수십 년 동안 해결 못한 숙원사업들을 박주선 의원이 4년간에 해치웠다”며 “박 의원의 엄청난 추진력에 광주·전남 시도민들도 놀라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2002년에는 전국 군읍(郡邑) 단위 최초로 도시가스를 공급해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지금도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강제로 분할되어 나주로 통합 되어버렸지만 화순군민들의 박주선 사랑은 지금도 끝이 없었다. 박주선이 옥중에 갇혀 제17대 총선에 옥중 출마했을 때 화순 사람들이 새로 지역구가 된 고흥땅을 누비며 눈물겨운 선거운동을 한 것만 봐도 화순 사람들의 박주선 사랑을 가늠할 수 있었다. “화순은 내 가슴에 영원합니다. 화순발전에 한시도 한 눈 팔지 않겠습니다. 화순군민 여러분 참으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남모르게 훔쳐내며 그는 고향 보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보성의 산하(山河)는 늘 그랬듯이 어머니의 품이었다. 악마의 불구덩이에서 타죽어 가는 박주선을 살려내자고 두 번씩이나 떨쳐 일어났던 ‘의향(義鄕) 보성’이였다. 생(生)이 다할 때까지 아무리 헌신하고 사랑해도 모자랄 ‘생명의 고향’이었다.

보성은 가난하기 그지없는 낙후된 변방지역이었지만 그는 국회의원 재임기간 중 상상을 초월한 예산을 끌어와 사통발달의 도로망을 구축해 연 인원 500만 명이 찾는 전남 최고의 관광지로 변모시켰다. 당시 익산지방국토관리청 관할(전남, 전북, 광주, 제주) 48개 시군 예산 가운데 박주선 의원이 4년 동안 보성 화순에 끌어온 예산이 전체의 23.8%나 차지해 박주선 의원의 엄청난 파워와 추진력에 전남도청 관계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는 발길을 재촉해 17대 총선 때 옥중에 있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박주선 후보에게 성원과 지지를 보내준 고흥군민들에게 달려갔다. 난생 처음 만나는 고흥 유권자들과 지지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박주선이 17대 총선에 옥중 출마했을 때 화순·보성 군민들이 고흥 땅을 찾아 자발적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화순·보성에서의 박주선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얼마나 큰 지를 알고 큰 감동을 했었다. 녹동항을 건너 소록도에 들어가 한센병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밝은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그는 경외감마저 들었다. 낯선 곳 고흥반도에도 어느새 박주선의 흔적과 혼이 배어 있었다.


서울시장 후보로 두 번째 호남과 민주당의 순교자가 된 박주선

전남지사를 포기하고

당의 명령을 따르다


대법원에서 3번째 무죄판결이 확정된 직후부터 박주선은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등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박주선을 가장 경계하고 시기했던 소위 여권 인사들은 물론, 한나라당 등 야권에서도 박주선의 폭발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서로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5년 10월 하순, 당시 열린우리당 전남도 사무처장, 열린우리당 소속 전남 지역 시장, 군수 등 9명이 박주선을 찾아왔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 박주선을 열린우리당 전남지사 후보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열린우리당 입당과 전남지사 출마를 권유하면서 패배하면 요직에 기용하겠다며 집요하게 설득해 왔다. 그러나 박주선은 이념과 노선이 다르고 민주세력과 호남 분열의 본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민주당의 정통과 이념을 존중하고 원칙과 정도를 지킨 박주선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을 외면하고 심지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지역구인 화순·보성을 공중분해시켜 버렸던 민주당이었지만 더 이상 증오하고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민주당은 단순한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50여년 동안 호남의 혼과 눈물과 땀과 피로 만들어진 호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호남을 사랑하기 때문에 민주당이 내민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민주당은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제2기 민주정부인 노무현 정권을 재창출했지만 열린우리당의 분당으로 졸지에 군소 야당으로 전락하여 피눈물나는 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민주당에 복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은 박주선의 능력과 자질, 인맥을 아까워하며 전남이 매우 낙후되어 가고 있고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5월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전남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고향 전남을 살려 달라고 강력히 권유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박주선의 탁월한 정치적 능력이나 자질을 알고 그를 아꼈던 많은 사람들은 박주선이 호남에서 DJ대통령의 뒤를 이을 사람인데, 지방 인물이 되면 안된다 면서 전남지사 출마를 적극 만류하기도 했다.


결국 박주선은 수많은 분들과 상의하고 고민한 끝에 경제적 낙후에 신음하고 있는 고향땅 전남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에서 전남지사 출마를 결심하고 2006. 1 하순경 전남지사 선거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전남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민생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중앙일간지 내일신문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선거 두 달을 남겨둔 2006.3월 현재 현 지사가 34.3%, 박주선이 33.7%의 지지율을 보이며 호남의 새로운 희망으로 급부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박주선에게 “쇄락해 가는 민주당을 재건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민주당을 가장 대표할 수 있고 3번 무죄판결로 청렴성과 강직성이 입증된 박 의원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되어야겠다”면서 구당차원에서 출마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한화갑 대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를 정치인으로는 박주선을 따를 사람이 없다. 내가 재판에서 잘못되면 당을 이끌어 달라”고까지 말했다.

한 대표는 또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 모두 법조인 출신이 서울시장 후보가 된다고 하는데 법조인으로서의 명성과 신망을 얻고 있는 박주선과는 상대가 되지 않지 않느냐?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물론이고 낙선이 되더라도 박주선의 진면목을 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고 민주당 재건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라며 박주선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박주선은 전남 회생이라는 절박한 현실과 침몰 직전의 민주당 재건이라는 명분 사이에서 몇 일 동안을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전남지사 도전을 위해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과 자신의 참모들에게 의견도 구했다. 대승적 차원에서 당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며 큰 정치인의 자세라고 하면서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이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당선이 충분히 가능했던 전남지사 출마를 접고 당의 요청에 따라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고뇌에 찬 결단을 단행했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던 후원자들로부터 많은 실망과 함께 원망까지도 듣게 되었으나 민주당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당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자세로 정치에 임하는 박주선의 인물됨과 정치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훗날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인간 박주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떠나 분명 호남인의 자존심과 시대정신을 살리기 위한 대의(大義)였음이 분명했다.

박주선은 고군분투했다. 침몰해 가는 민주당호를 살리기 위해 사즉생의 각오로 뛰었다. 눈물겨운 처절한 절규에 서울시민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능력과 자질, 도덕성, 청렴성, 국정수행 경륜으로 보아 박주선이 서울시장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참담한 패배였다.

당시 선거는 노무현 정권 심판이라는 민심이반으로 한나라당에 반발표가 몰려 버렸다. 당시 서울시장으로 바람개비 후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여론용 후보라고 폄하되었던 오세훈씨가 당선된 것은 노정권의 국정실패에 대한 심판론이 워낙 강하게 작용해 인물보다는 반노 또는 비노라는 여론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결국 박주선 후보도 낙선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사실상 피해자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여론의 평가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서의 민주당 지지율이 1% 미만이었던 상황에서 박주선은 약 8%의 득표라는 엄청난 바람을 일으켜 민주당 재건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당내에서는 “서울시민 대부분이 서울시장감은 박주선인데 노무현 정권 심판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무조건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어 박주선이 억울하게 희생되어 패배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당시 정운찬 서울대 총장,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뉴라이트의 김진홍 목사 등의 유력인사들이 박주선을 지지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나라당에서도 인물은 박주선이 시장감이라고 평가했었는데 당세와 노무현 심판론에 밀려 박주선이 아깝게 희생당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박주선은 민주당과 호남을 지키기 위해 열린우리당의 분당을 온 몸으로 저지하며 합류를 거부해 참혹한 탄압을 당했던 첫 번째 순교에 이어 분명 두 번째 호남과 민주당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의 중심에 서서...

소년 박주선은 보성 산골마을 토담집 촛불 아래서 수재의 꿈을 키웠다. 행상으로 아들들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들이 행여 몸이라도 상할까 “애야! 그만 불 끄고 자거라”라며 애처로워했다. 그때마다 공부 잘하는 박주선은 “어머니! 아직 끌 때가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주무세요”라며 어머니께 홑이불 자리를 정성껏 깔아 드리곤 했다. 박주선에게 ‘타오르는 불’은 희망이요 신념이요 존재이유였다. 이런 어머니와 아들의 애처로운 대화는 세월이 흘러도 환경이 달라져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서울대 법대 합격, 사법시험 수석합격, 대한민국 최고의 명검사 활약, 대통령 법무비서관(현 민정수석+인사수석) 발탁, 16대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훌륭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지난 7년 여 동안에 걸쳐 사악한 음모 세력들에 의해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라는 치욕적인 인격살인과 함께 생명과도 같은 명예를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러한 사상 초유의 폭압행위는 박주선만의 차원이 아니었다. 호남의 정신을 말살하고 국가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려는 반국가적 반민주적 분열주의자들의 발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사는 박주선에게 자신의 고통만을 반추하며 보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을 내세워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호남의 여론도 김대중 이후의 큰 인물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정부라는 정권 재창출에도 불구하고 정부주도 개발경제정책에서 오랜 기간 소외된 영향으로 여전히 타지역에 비하여 현저하게 뒤처진 현실을 감안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넘어서는 차세대 정치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 호남에는 인재가 많아 훌륭한 정치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전국을 아우르는 정치역량을 갖춘 탁월한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죽하였으면 2007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호남이라는 지역극복을 명분으로 “‘호남 뭉치자’는 말만 하며 저급한 전략을 쓰는 호남지역 국회의원들과 답답해서 일을 못해 먹겠다”라는 모욕적인 소리까지 듣게 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을까? 물론 호남의 오랜 지역차별의 한과 현실을 절실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호남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호남에 대한 세간의 몰이해는 김대중 대통령 처럼 정치탄압으로 담금질을 당한 차세대 정치지도자의 탁월한 정치력으로 반드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고 이수일 호남대 총장(전 국가정보원 제2차장, 감사원 감사위원 역임)은 생전에 지우들의 모임인 사석에서 “2002년 11월 정보기관에서 호남의 차세대 대표주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정보적 차원에서 조사하여 자료를 수집, 검토하였더니 압도적 비율로 박주선이 적합하다고 나왔다.”며 박주선에게 “크게 기대하고 있으니 더욱 열심히 하라. 험악한 정치판에서 중상과 모략질을 잘 이겨내고 큰 인물이 되라”고 박주선에게 당부와 격려 전화를 해주었다고 회고했었다. 또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2006년 3월 하순 “김대중 대통령을 이어받을 호남의 차세대 주자가 박주선이라는 점은 이론이 없다. 우리당에도 이러한 인물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서울시장 후보로 박주선을 전략공천하는데 앞장섰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박주선에 대해 뜻있는 대부분의 서울시민, 국민들은 “서울시장감으로는 역시 박주선이다. 소속정당만 잘 선택하였으면 무조건 서울시장이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모 인터넷신문은 박주선이 서울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제17대 대통령 당선자)도 훗날 “나도 한나라당 당원만 아니었다면 박주선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사석에서 지인에게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호남의 차세대 지도자로서 박주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정치역량을 배가시키고 있다. 예컨대 박주선은 2005년 5월 3번에 걸친 표적 탄압의 폭압을 뚫고 광명의 세상으로 나온 후 ‘자신에게 시련을 내린 하늘의 숨은 뜻’이 정녕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민족의 영산 지리산과 백두산을 차례로 올라 하늘 가까이에 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촛불을 들었다. 밀려오는 안개구름을 온 몸으로 안으며 정상에서 외쳤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라고. 손발이 다 닳도록 오로지 자식 잘되기를 바라며 희생만 해 오셨던 노모에게 모든 걸 다 바쳐 보은해야만 할 박주선. 그런 그가 어머니를 향해 또 다시 ‘촛불을 아직도 끌 때가 아닙니다’라고 소리 높혀 외친 절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일신의 영달(榮達)을 위해서일까? 아니다. 그는 분명 역사 앞에서 어머니와 다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孝誠)이 애향(愛鄕) 애국(愛國)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지리산과 백두산 정상에서 다시 타오른 박주선의 촛불은 그의 또 다른 희망과 염원을 안고 고향과 국민을 위해 숭고하게 산화해 갈 것임을 맹세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는 ‘남해안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전남 해남의 달마산을 올랐다. ‘땅끝 마을’로 유명한 그곳에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은 한반도의 끝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륙으로 향하는 육지의 ‘첫 땅’이었던 것이다. 그는 ‘첫 땅’에 다시 선 것이다. 남도(南道)의 끝자락이 아닌 한반도의 시작이요 대륙의 첫 관문에 서서 그가 ‘다시 쓸 역사’와 마주한 것이었다. 대륙의 역사와 대양의 역사를 한 가슴에 안은 것이다.

그렇다. 그는 지금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에 호남 없다면 대한민국도 없다)’의 중심에 서있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광주여! 무등산이여!

호남의 심장 광주의 부활을 외치며...

도심 공동화로 침체에 빠져 있는 광주 경제를 살리고, 민주당의 심장부인 광주에서 당의 부흥을 주도해 달라는 중앙당 및 광주와 동구지역 당원들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2007년 8월 박주선은 민주당 광주 동구지역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그에 앞선 지난 2007년 1월에는 박광태 광주광역시장, 유태명 동구청장, 손재홍 광주광역시의회의원 등이 박주선을 초청하여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박주선에게 대한민국의 정치 1번지의 상징성을 갖고 있는 광주 동구에서 정치적 재기를 하라고 권유했다. 이들은 나아가 도청 이전과 신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동구가 가장 낙후된 지역이니 행정부 등 각계 요로에 풍부한 인맥을 갖고 있는 박주선이 광주와 동구 발전을 위해 동구지역에서 18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특히 이들은 박주선이 동구에서 총선에 출마할 경우 최대한 돕겠다며 4인이 함께 손을 얹어 소위 ‘도원결의’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박주선의 민주당 광주동구지역위원장직 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박주선은 호남의 영산(靈山) 무등산을 올랐다. 그리고 천제단의 제단 위에 박주선의 영혼과 육신을 올렸다. 그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무등산을 향해 외쳤다. “광주여! 무등산이여!” 호남의 심장 광주의 부활을 외치고 있었다. 우리 역사와 민족앞에 정녕 광주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광주는 몇 시인가? 21세기 광주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광주의 비원(悲願)과 꿈은 과연 무엇인가? 그는 광주가 아프면 호남이 울고 나라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광주의 부활이 호남의 번영이고 나라의 융성임을 주장하고 있다.

“전남도청의 이전에 따른 지역 공동화와 민심의 절망감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 호남 정치의 구심점 상실로 인한 정치적 패닉 현상도 극복해야 한다. 광주와 호남에 몰아닥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새로운 환경과 신질서, 그리고 요동치는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호남의 뉴리더와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며 박주선은 위기의 광주와 호남을 진단하고 있다. 그는 분명 광주와 호남의 새로운 대안으로 돌아 온 것인가? 지난날의 그의 삶과 역량을 투시해 보면 해답이 보일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 2001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전남지역 국회의원들이 모여 전남도청 이전 문제에 대한 워크숍을 개최하였는데 당시 권력 실세를 의식하여 감히 아무도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중 유일하게 박주선 의원만이 전남도청의 이전은 광주의 도심 공동화를 자초하므로 이전이 적절치 않고, 꼭 이전할 수밖에 없다면 먼저 광주 발전대책을 철저히 강구하여 병행추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여당 의원으로서는 DJ정부에 대한 항명에 가까운 파격발언으로 언론에 까지 보도되기도 했었다. 박주선의 정치적 소신과 대범함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었다.

2007년 10월 무등산의 천제단에 올랐을 때 그와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이 바친 헌시가 잔잔한 감동을 일으켜 준다.

호남의 비원(悲願)을 굽어 살피시는 천신(天神)이시여!

늘 여기 무등산의 제단(齋壇) 앞에 모인 우리는

광주와 호남의 혼(魂)과 기상(氣像)을 다시 일으켜

이 나라 이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비장(悲壯)한 결의를 바치오니

굽어 살피시어 소원 성취토록 해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무등의 제단 앞에 모인 우리는

엄동설한을 헤치고 다시 피는 인동초(忍冬草)처럼

하늘이 내린 시련까지도 꿋꿋이 이겨내 낸

호남 100년 인재를

7천만 겨레의 품에 바치오니

굽어 살피시어 소원 성취토록 해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무등의 제단 앞에 모인 우리는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희망,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다시 함께 가는 이 길을

굽어 살피시어 소원 성취토록 해주시옵기를 간청하오니

이에 흠향(歆饗) 하시옵소서.

2007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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