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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의 아름다운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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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음 따뜻한 명검사 박주선(朴柱宣)

작성일09-10-21 17:49 조회9,225회 댓글0건

본문

제2부

마음 따뜻한 명검사 박주선(朴柱宣)

찢어지게 가난한 토담집서 수재(秀才)의 꿈은 영글고...

행상 어머니생각 “불쌍한 사람 돕겠다” 검사의 꿈 키워

서울 전농동 5만원 판자집서 밥푸며 서울대 재수

16회 사법시험 수석합격 - 어머니 가슴에 얼굴 묻고 통곡

초임시절부터 검찰총장감으로 지목 - 청렴, 강직 상징 박주선

이철희·장영자 사건 등

대형사건 수사로 이름 날린 명검사(名檢事) 박주선

구속시킨 피의자도 감복한 ‘마음 따뜻한 검사‘ 박주선

땅끝 해남에 심은 ‘동백꽃 사랑’ - ‘동백장학회’를 설립하며...

“DJ 비자금 사건수사 유보” 결정주도 - 김대중 대통령 당선 1등 공신

대통령 법무비서관으로 김대중 정부의

고위직 인사, 사정(司正), 국정개혁(改革) 진두지휘

김대중 대통령의 깊은 신뢰 - “박주선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

“큰 일을 할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시련을 내린다”

“반개혁 세력 음모의 희생양” 된 억울한 박주선

‘무죄판결’로 진실 밝혀진 옷로비 광풍 -

DJ정권 최대의 정치적 희생양 박주선

찢어지게 가난한 토담집서

수재(秀才)의 꿈은 영글고…

1974년 3월 19일. 제16회 사법시험 발표가 있던 날 박주선(朴柱宣)은 남루한 행상 차림을 한 어머니의 옷깃 속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린 그는 “오늘의 영광은 어머니의 피눈물나는 뒷바라지 덕분입니다.”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법시험 합격, 그것도 수석합격이라는 박주선의 영광은 말 그대로 어머니와 가족의 눈물과 땀방울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박주선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주선은 1949년 음력(윤달) 7월23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평리 156번지에서 태어났다. 보성읍에서 4km 떨어진 봉화산 정기를 받은 가는골(細洞)마을 토담집이었다. 박주선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장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 집에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자연히 집안 살림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줄곧 어머니가 사실상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면서 계란과 쌀을 사서 광주의 대인시장과 남광주 시장에 내다 파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고, 박주선과 그의 동생 주현 두 아들의 학비도 댔다.

어머니와 박주선은 꼬박 밤을 새워 짐을 꾸린 후 보성읍에서 6km 떨어진 봉산리에서 새벽 2시에 일어나 무거운 쌀자루와 채소, 달걀 등을 짐수레에 싣고 십오리 길을 뛰다시피 짐수레를 끌고 보성역에 도착하여 어머니는 새벽4시 기차를 타고 광주로 장사를 나갔다. 그 때문에 박주선의 어머니는 지금도 양 무릎에 심한 퇴행성 관절염과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박주선이 보성 남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해 도지사상을 받고 보성중학교에 합격했으나 당시 입학금 1,100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그만둘 처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박주선을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 팔아서 입학금을 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의 사법시험 수석합격의 영광은 바로 “어머니의 땀과 피와 눈물의 결정체”였다.

행상 어머니생각 “불쌍한 사람 돕겠다”

검사의 꿈 키워

보성중학 시절 행상을 하던 어머니의 광주-보성 간 기차 ‘무임승차 사건’은 박주선이 커서 검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효성이 지극했던 어린 박주선은 학교가 끝나면 보성 역전으로 이른 새벽에 집을 나가 해질 녘쯤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마중 나가곤 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여름 날 박주선은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시간에 맞춰 보성 역전으로 갔다. 우산이 없어 옆집에서 헌 비닐우산을 빌렸고, 바람으로 인해 우산이 찢어질까 봐 우산을 펴지도 않고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비를 맞은 채 그대로 들고 가기로 했다.

보성 역전에 도착한 박주선은 어머니가 나오시기를 기다렸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중 역 사무실에서 역무원과 얘기를 나누던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돈을 안내고 무임승차했다가 발각되어 역무원에게 불려간 것이다. 어머니는 이 날 비가 많이 와서 광주에서 가져간 물건을 팔지 못해 돌아갈 차비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무임승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쌀과 계란을 압수당할 처지에 있게 되었다.

이때 박주선을 감동케 하고 그의 미래를 결정하게 한 일이 발생했다. 한 역무원이 다가와 압수당한 쌀과 계란을 돌려주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역 사무실 창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광경을 목격한 박주선은 “열심히 공부해 대한민국 최고의 검사가 돼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이 같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뒷바라지에 힘입은 박주선은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호남의 명문 광주고(光州高)에 입학했다. 이후 줄곧 전체 수석을 유지하던 박주선은 졸업을 앞두고 동생과 큰 싸움을 했다. 그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박주선은 동생에게 “배워야 한다. 고등학교에 가라”고 했고 동생은 형에게 “형이 공부를 잘하니 형이 대학에 가라. 나는 형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맞섰다. 집안 형편이 둘 다 가르칠 수 없었기에 형제간에 서로 양보하려고 다퉜던 것이다. 결국 광주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형이 대학에 진학하기로 어렵게 의견이 모아졌다. 어머니는 형제간의 ‘다툼’을 보며 말없이 눈물만 훔쳤다.

서울 전농동 5만원 판자집서

밥푸며 서울대 재수

그러나 박주선은 마음의 부담 때문인지 서울대 법대에 두 번이나 낙방했다. 어머니는 실의에 찬 아들을 위로하며 박주선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5만원짜리 판잣집을 얻어 막노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밥을 푸면 박주선은 밥을 나르면서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했다. 동생 주현이는 신문 배달을 해가며 집안 생활비를 벌었다. 밥이 다 팔리는 날은 먹을 밥이 없어 세 식구가 함께 굶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박주선은 지금도 지하철이나 길을 거닐 때 어려운 아주머니들이 나눠주는 광고 전단을 쉽게 지나치질 못한다고 한다. 전단을 받아 처리하는 것이 귀찮지만 전단 하나라도 받아 주는 것이 가난한 아주머니들을 돕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어머니가 생각나서 일 것이다.

박주선은 3수 끝에 70년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 4학년이던 1974년 제16회 사법시험에 당당히 수석으로 합격했다. 고향인 보성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중앙 일간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이 그의 인간승리를 대서특필(大書特筆)했다.

그러나 박주선은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검사가 되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주선이 결혼할 나이가 되자 여기저기서 혼담이 쇄도했다. 모 재벌을 비롯해 서울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문가(名門家)에서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혼담이 들어왔다.

그러나 박주선은 “우리 가정 형편에 맞고 부모님을 이해 해주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한번 결심하면 흔들리지 않은 박주선은 합리적이며 예(禮)를 숭상하는 집안의 규수로서 중학교 선생님이던 이현숙씨와 1979년 결혼, 아들 셋을 두었다.

16회 사법시험 수석합격-

어머니 가슴에 얼굴 묻고 통곡

초등학교 시절 박주선은 무거운 쌀 꾸러미를 어머니의 머리 위에 올려주면서 맞잡은 어머니의 손이 매우 거칠어진 것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박주선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야말로 노력가였다. 보성남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박주선은 ‘보성 3총사’로 불릴 만큼 가까운 박옥근(개인사업), 이용철(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등 평생을 함께 할 친구를 만났다.

이들은 항상 1,2등을 다투는 선의의 라이벌이자 격의 없는 친구였다. 박주선은 지금도 이들에 대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신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친구라고 말한다.

보성중을 차석으로 졸업한 박주선은 전라도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몰리는 광주고에 입학했다. 그리고 광주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보성에서 짐을 들고 나설 때 어머니는 “방학이 아니고는 절대 내려오지 마라. 건강과 공부에만 전념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주선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한 달 동안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자주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일주일에 한 번씩 보성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어머니가 오히려 매주 광주로 올라와 박주선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광주고에 들어가 검사의 꿈을 키우던 박주선은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 졸업생이던 동생 박주현과 서로의 진학을 위해 양보하는 언쟁을 벌이다 결국 ‘큰 꿈을 이루라’는 가족들의 뜻을 따른다.

서울대 법대를 응시했다가 연거푸 고배를 마신 박주선은 3수를 한 끝에 드디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박주선은 언제나 노력과 끈기로 자기가 세운 목표를 성취해 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남다른 노력으로 4년 동안 줄곧 장학생으로 정상을 차지했다. 사법시험 준비는 대학 도서관과 세 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박주선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늦은 밤 어둠이 깔린 동네 모퉁이를 돌아 힘든 발걸음으로 집에 오시는 어머니를 보며 합격의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1974년 3월, 박주선은 제16회 사법시험에 드디어 합격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합격했다. 중앙과 지방의 전 언론들이 그의 인간 승리를 앞 다투어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내 자신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검사가 되었다고 인생에 있어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와 나의 가족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퇴색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지금보다 더 순수해져야 하며 더 솔직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에게는 더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며 ‘검사 박주선’보다는 ‘인간 박주선’이 되고자 각오를 다졌다.

초임시절부터 검찰총장감으로 지목-

청렴, 강직 상징 박주선

박주선을 아는 사람들, 특히 검찰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그를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청렴함은 여러가지 사례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초임검사 시절인 79년말의 일이다. 온갖 화려한 조건의 결혼 상대를 마다하고 평범한 여성과 결혼한 박주선은 자동차가 올라가기 힘든 달동네 꼭대기에 신혼 방을 마련했다. 검사에 대한 주위의 일반적인 시선과는 달리 이들 젊은 검사부부는 가난하지만 청렴한 생활을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동네 사람들이나 박 검사 주변에서는 검사가 달동네 생활을 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1989년 부임했던 해남지청장 때 있었던 일이다. 이미 박주선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인 금품을 일체 안받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 소문이 광주고등검찰청 조성욱 검사장(현 변호사)의 귀에 들어갔다. 하루는 조 검사장이 불러 가니까 “우리 검찰에 이렇게 청렴한 검사가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격려해 주면서 조 검사장이 자기 월급봉투를 내밀더라는 것. 박 검사가 “이게 뭡니까?”라고 하자 “내가 박 검사에게 격려금을 주고 싶은데 그냥 돈 봉투를 주면 박 검사 성격으로 봐서 다른 사람한테 받은 돈인 줄로 알고 안받을 것이 뻔하니까 내 월급봉투째 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주선의 청렴, 강직함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일화가 또 있다. 청와대 법무비서관 근무시절인 99년 추석 때 있었던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장관들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 집으로 홍삼 세트를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평소 어떤 선물도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만큼 박주선 집에서는 이 선물도 그냥 돌려보냈다. 나중에 박금옥 총무비서관으로부터 “대통령의 선물도 물리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는 꾸중 아닌 꾸중까지 받아야 했다. 당시 언론에 미담기사로 보도 되었었다. 또 그가 옷사건으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석방되었을 때 김 대통령이 “건강진단도 받고 가족과 식사나 하라”며 위로금을 비서를 통해 보내겠다고 하면서 “또 받는다 안받는다 하지 말고 얼마 안되는 돈이니 받으라”고 전화까지 할 정도였다.

검찰 내에서도 그는 소위 전별금이나 떡값 등을 일절 안받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혹시 자리에 없는 사이 돈을 놓고 가면 다시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그 돈을 검찰청사 청소관리원과 경비원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곤해서 ‘인정 많고 마음씨 좋은 검사님’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박주선의 청렴, 강직함은 그의 검사 경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가 호남 출신 검사로는 유일하다고 할 만큼 5, 6공 시대와 김영삼 정부 시절에서도 항상 선두를 달렸던 것도 그의 청렴, 강직함과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상사나 동료들은 박주선을 훗날 검찰총장감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박주선은 사법시험 수석합격 후 5년간의 사법연수원 및 군법무관 생활을 끝내고 79년 서울지검으로 발령 받았다. 1년 3개월간의 공판부와 형사부를 거친 뒤 초임검사로는 파격적으로 검찰의 꽃인 특수부에 배치 받았다.

호남출신 검사로서는 최초로 초임 검사가 특수부에 발령된 것에 대한 일화가 있다. 형사부에서는 박주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당시 김석휘 검사장이 차장검사, 부장검사 회의를 개최하면서까지 ‘박주선의 장래와 검찰의 명예를 위해 박검사를 특수부로 보내기로 결심한 후 간부회의에서 박검사를 특수부로 보낸 배경을 설명하고 형사부의 동요가 없도록 해달라는 특별언급을 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등

대형사건 수사로 이름 날린

명검사(名檢事) 박주선

박주선은 특수 수사통으로서의 명성을 부임 초기부터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임검사에 대한 시련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81년 저질연탄 사건. 당시 박주선 검사는 동력자원부 석탄국장을 수뢰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모씨가 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있던 군사독재 시절, 신출내기 검사가 석탄과 연탄산업 주무국장으로서 석탄사업 장려금 배정권한을 쥔 막강한 석탄국장을 구속한 것이다. 당연히 청와대, 안기부, 업계 등으로부터 조직적인 로비와 압력이 가해졌다. 박주선에 대한 온갖 음해성 투서들이 권력기관에서 권력기관으로 흘러 다녔다. 옷을 벗어야하는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직하기로 소문난 박주선은 사건을 밀어붙여 1, 2, 3심에서 전부 유죄를 이끌어냈다.

이후 박주선은 해남지청장,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대검 초대 환경과장, 대검 중수부 3과장, 2과장, 1과장, 서울지검 특수2부장, 특수1부장, 춘천지검 차장검사,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 등 검찰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다. 호남출신은 주요 핵심보직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통설을 뒤엎기라도 하듯 그는 승승장구했으며 아직까지도 박주선과 같이 중앙수사부 전 부서를 근무한 검사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가 다룬 사건 중에는 대형 사건들이 유독 많다. 이철희·장영자 사건(82년), 군 인사(軍 人事) 비리사건(93년), 율곡비리사건(93년), H그룹 회장 외화밀반출 사건(93년), 대전 엑스포조직위 비리사건(94년), D그룹 부도사건(95년), 서울시 교육위원 수뢰사건(96년), 보건복지부장관 부인이 연루된 안경사협회 로비사건(96년), 그리고 97년 대선 때 최대 쟁점이었던 ‘DJ 비자금 사건’(97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는 검찰 내에서 가장 탁월한 수사 능력과 청렴성을 인정받아 95년에는 ‘올해의 공무원’에 뽑혀, 공무원으로서는 최고 영예인 황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구속시킨 피의자도 감복한

‘마음 따뜻한 검사’ 박주선

박주선은 검찰내 최고의 특수 수사통으로 권력층, 재력가,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수 없이 다루었지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피의자가 스스로 납득하는 수사, 누구든지 조사결과에 승복하는 수사를 한다’는 좌우명 때문인 것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박주선은 청렴, 강직한 검사로 알려졌지만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적지 않다. 94년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 2과장으로 근무할 때 대전 엑스포조직위원회 파견공무원의 뇌물사건 수사를 맡을 때였다. 총 12명을 구속하고 56명을 사법처리하면서 모 건설회사로부터 2,1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돼 수배 중이던 모 부처 5급 공무원 김모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김 모씨는 그 동안 도피생활을 하면서 유방암에 걸려 병원에서 투병중인 자기 아내의 병간호를 어렵게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통의 편지가 왔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인데 남편으로 하여금 나의 마지막 병간호를 위해 구속만은 면하게 해 달라”며 “…3개월 시한부 인생인 제가 남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둘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관용을 베풀어 주신다면 3개월이 아니라 30년도 더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그의 아내의 눈물어린 편지와 함께 남편도 자수 의사를 밝혀왔다.

그는 자신이 구속될 경우 아내를 간호할 사람이 없어 그대로 숨지게 될 것이란 생각에 검찰의 소환에 불응한 채 도피생활 도중 틈틈이 집으로 가 부인을 간호해 오던 터였다.

‘가슴 따뜻한 검사’ 박주선은 다른 피의자와의 형평성 문제로 고민을 하다 과감히 불구속 결정을 내렸다. 그를 구속하는 것은 병상의 아내와 그의 세 자녀까지 구속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원래 청렴한 공무원이었는데 아내의 막대한 암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죄짓는 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김씨의 아내가 그의 품안에서 영원히 잠들었을 때 박주선 검사는 직원을 시켜 조의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일주일 후 그 여인의 여동생이 감사 전화를 해왔다. “언니는 눈을 감으면서 너무너무 감사해 하셨어요. 우리나라에도 검사님 같은 분이 계신줄 몰랐다며 고마운 검사님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어요. 저 세상에 가서도 박 검사님이 잘 되시기를 빌겠다고 하셨어요”라며 그 뜻을 박주선 검사에게 전하도록 자신의 여동생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박주선은 ‘법에도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가난했던 지난날의 경험은 박주선으로 하여금 가난과 소외된 사람들,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들어주고 건강하고 따뜻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 소중한 체험임을 또 다시 일깨워 주었다.

당시 12명을 구속시키는 대형사건인데 유독 김씨만 불구속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한 일간지 기자가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자 박 검사가 설명하는 전후 사정을 듣고는 ‘보기 드문 미담’이라며 보도하기도 했다.

땅끝 해남에 심은 ‘동백꽃 사랑’-

‘동백장학회’를 설립하며...

89년 땅끝 마을이 있는 해남지청장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관내가 모두 시골이라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이 사고를 치고 잡혀 들어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주 작은 보살핌만 있으면 건강한 심성과 훌륭한 학생으로 자랄 청소년들이 가정환경과 금전적인 문제로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접어드는 현실을 보면서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박주선은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으로 공부하며 궁핍하게 생활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처럼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그는 장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박주선의 뜻에 감복한 해남지청 청소년 선도위원들은 장학재단 설립을 발의했고 그 스스로가 사재를 털어 금일봉을 출연했다. 이름하여 ‘동백장학회’였다. 검찰이 주도한 최초의 장학재단이었다. 설립초기부터 열화같은 성원이 답지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억 5천만원이라는 기금이 조성되어 출범되었다. 불우한 인재를 키우기 위한 그의 간절한 소망은 해남지청 청소년선도위원들과 지역 유지들의 계속적인 노력과 기여로 현재 10억원 가량의 기금이 확보되었으며 그간 불우 장학생(중, 고, 대학생), 소년 소녀 가장 및 불우 시설을 지원하는 등 모두 1천 여 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에게 수 억 원씩을 지급해 오고 있다.

땅끝 마을 해남에 심어 놓은 박주선의 따뜻한 ‘동백꽃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주선은 “가난과 불우한 환경에 내몰린 그들에게 희망마저도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훗날 이 사회를 원망하게 될 것”이라며 “배움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새로운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그의 남다른 ‘해남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DJ 비자금 사건수사 유보” 결정주도-

김대중 대통령 당선 1등 공신

97년 대통령 선거 개표가 진행되던 12월18일 새벽 4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이 거의 확정되는 순간 박주선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DJ에 대한 호남 출신으로서의 애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검찰총장의 꿈을 접느냐 마느냐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최대 쟁점이었던 ‘DJ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 유보를 강력 주장하면서 수사유보 발표문을 직접 작성한 사람이 바로 박주선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박주선은 “때가 적절치 않으면 정의(正義)도 불의(不義)”라고 하면서 “청와대의 지시로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 되어 금융실명제를 위반하여 불법으로 금융계좌를 추적한 다음 검찰을 이용하여 대선정국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권력과 집권당의 음모와 흉계에 검찰이 하수인이 될 수 없다”며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대선 후로 수사를 미루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훗날 DJ대통령도 “만일 여권이 제기한 DJ비자금 의혹을 검찰이 수사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느냐”라고 박주선을 격려하기도 했었다. 최근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이 직접 검찰에 지시하여 DJ비자금 수사를 유보시켰다”고 한 발언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주선은 훗날 “검찰총장이 되겠다는 꿈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검사의 양심상 도저히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되는 검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했었다.

박주선은 청와대 대통령 법무비서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한번도 DJ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DJ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DJ 비자금 사건’ 수사를 담당했다는 정도다. 그런 그가 김대중 대통령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청렴 강직성에 호감을 가진 청와대 인수위 팀의 적극적인 천거와 고교, 대학 선배로 검찰에서 6번씩이나 함께 근무해 누구보다 박주선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수 차례에 걸친 권유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박주선은 처음부터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어릴 적 “검사가 돼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소박한 꿈을 실현코자 했기 때문이다. 즉 검찰 총수를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권력에 가까이 가면 타 죽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박주선은 청와대 근무를 끝내고 다시 검찰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전제로 결국 김 전총장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 탄생 이후 매일경제신문사에서 발간한 「김대중시대의 파워엘리트」라는 책에서 박주선 검사를 “깐깐한 검찰세계에서 ‘검찰의 이수성’으로 불릴 만큼 친화력이 뛰어나며 화통한 화술로 분위기를 사로잡는다”고 표현했다. 김상현 전 의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마당발로 통하는 이수성 전 총리는 박주선과 서울대 법대 사제지간(師弟之間)으로 각별한 사이. 이 전 총리가 서울대 법대교수로 초임발령을 받았을 때 박주선은 학생으로 만났다. 학창 시절부터 박주선 학생을 유달리 좋아했던 이수성 전 총리는 한 사석에서 박주선을 평하기를 “‘검찰의 이수성’을 훨씬 능가하는 출중(出衆)한 인물”이라면서 “사법시험을 수석(首席)으로 합격한 사람들이 갖는 엘리트 의식이나 영리한 사람이 범하기 쉬운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소탈하고 호방(豪放)한 성격으로 정감(情感)넘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정치를 하면 대성(大成)할 인물로 강력한 리더십과 좌중을 휘어잡는 매력있는 풍모를 지닌 친구 같은 제자”라고 극찬했다.

대통령 법무비서관으로 김대중 정부의

고위직 인사, 사정(司正),

국정개혁(改革) 진두지휘

법무비서관은 현 정부의 인사수석비서관과 민정수석비서관의 역할을 하는 자리로서, 정부 고위직 및 정부산하기관의 장·감사 등을 검증, 추천, 보직 승인을 하는 역할을 하고, 각 부처의 이전 정부까지의 지역, 학교 등의 연고에 의한 자기사람 심기의 편중인사를 과감히 시정하여 각 부처의 인사정상화를 이룩하고자 설치된 정부개혁의 중추기관이었다. 특히 박주선이 당면한 각 부처의 인사정상화는 50년만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개혁의 제 1과제였다. 그렇지만 김대중정부의 인사혁신은 순탄치 않아 처음부터 기득권세력의 거센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박주선은 지나치리만큼 철저한 자기관리와 원리원칙으로 공공부문의 인사를 혁신하여 김대중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를 주도하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공직 뿌리부터 깨끗해야 국가의 근본이 서고 기강이 확립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부정부패의 척결과 비리 정치인과 재벌들을 단호히 단죄하는 것만이 IMF를 극복하고 국가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뜻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부 요직에 기용할 주요 인사를 검증, 심사하고 비리사정(司正)을 지휘하는 업무의 특성상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늘 정치권 최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박주선은 법무비서관이 된 뒤 단번에 김대중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청렴성과 강직함, 그리고 탁월한 정책판단 능력은 김대통령으로 하여금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케 했다. 이로 인해 박주선은 청와대에서도 대통령을 수시로 독대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청와대 관저는 물론 유일하게 수영장에서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당시 박주선이 맡은 법무비서관 자리는 현재의 민정수석비서관과 인사수석비서관 권한을 합친 자리로서 사정(司正)과 법률(法律), 특히 정부 요직 인사(人事)의 검증과 추천을 하는 공직기강(公職紀綱) 업무를 다루고 있는 막중한 자리였다. 김대중 정부 들어 장,차관은 물론이고 공공기관이나 정부 산하 기관 단체장에 임명된 사람들은 그가 일단은 문제가 없다고 판정을 내려 추천한 사람이다. 당시 박주선은 인사(人事)문제에 있어서도 대통령에게 직언(直言)을 잘하기로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다.

정권교체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게 되면 정부부처는 인사문제로 커다란 홍역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정부요직, 정부산하단체의 주요 인사를 앞두고 김대중 정부를 출범시킨 주역들인 당시 정치권 실세와 대통령 아들로부터의 인사청탁도 단호히 배제하여 당시 여권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볼멘소리를 하였을 뿐 아니라 정부요직에 특정인사를 천거한 대통령 아들에게는 “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뿐 누구의 압력이나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라고 대갈했다는 내용은 언론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한 예로 대통령이 망명중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해외동포를 정부산하기관의 장에 임명하려던 모 부처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대통령에게 동 사안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져 조언을 드리자 대통령으로부터 “없었던 일로 하라”는 지침을 받고 그 인사를 무산시킨 일이 있었다. 박주선 비서관은 대통령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성심으로 돌봤던 그 인사가 대통령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질까봐 그 인사를 미리 만나 “대통령께서 당신을 임명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대통령께 누가되는 인사이므로 내가 결코 승복할 수 없다. 당신이 대통령 마음이라도 편하게 먼저 대통령께 임명계획 철회를 요청하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인사원칙을 수립하면서도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박주선의 담대함과 치밀성을 함께 보는 대목이다.

이 일로 대통령 측근들 사이에서는 “박주선은 직언을 서슴치 않는 대단한 소신가”라는 평을 들었고 훗날 대통령은 모 장관에게 사석에서 “내가 박주선을 얼마나 총애하는 지 모른다. 바르고 소신있는 사람이다. 그런 박주선이 하는 인사도 편중인사라고 시비하는 사람이 있으니 부처 인사를 바르게 하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일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려 했던 그 인사는 몇 년 후 박주선을 만나 “당신이 청와대를 떠나지만 않았어도 대통령 아들들이 구속되는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처음에는 나의 임명이 무산된 점에 대하여 당신에게 서운하게 생각되었는데, 오히려 당신의 옳고 곧은 소신을 높이 평가한다”며 박주선에게 식사대접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박주선은 청와대 직제개편에 따라 김영삼 정권때의 민정수석실(인사, 사정, 민정업무) 직원을 절반이나 감원하게 되었는데 각 부처에서 파견된 고위공직자들이 각 부처로 6개월이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모두 공직을 떠나야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박주선 비서관은 “각 부처에서는 가장 우수한 공무원이 청와대에 파견되어 근무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옷을 벗게 할 수 없다”며 최우선적으로 이들 공무원들을 각 부처에 복귀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에 대기 중일 때에는 현직 근무자와 상의해서 근무수당 일부를 지원해주기도 함으로써 정권교체로 인한 공직사회의 동요를 막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공공부문 인사정상화는 사실상 호남출신 공직자의 상대적 불이익 시정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자칫 호남출신 대통령과 호남출신 법무비서관이 호남출신 공직자를 부당하게 발탁, 요직을 독점시킨다는 오해와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으므로 “공정한 인사원칙과 검증, 승인 지침”을 마련하여 각 부처의 인사안을 능력과 자질, 청렴성, 개혁성, 업적, 사생활, 세평 등을 철저히 검증하여 호남출신이기 때문에 부당한 발탁이나 요직기용을 예방하면서도, 호남출신이라는 이유로, 또한 호남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치밀한 검증을 하여 처리하였다. 그 결과 정권교체로 인한 호남출신 독식을 우려했던 공직사회가 안도하면서 안정되었고 김대중정부의 인사에 대해 여론으로부터 까지 큰 신뢰를 얻게 하였다.

그렇지만 IMF위기 극복을 앞세운 일부 부처의 호남출신 인사의 사실상의 배제에 대해서는 “인사정상화 없이 IMF위기 극복은 어렵다”며 부처의 인사안을 단호히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모 부처에서 인사안을 제출하였는데 호남출신 고위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박주선은 “왜 호남출신을 고위직에서 배제하였느냐”고 묻자 그 부처에서는 “IMF위기 극복이 급선무인데 사실 호남출신은 모두 부처산하의 외직 등 변방에 근무하고 있어서 이번 인사에서는 본부의 고위직에 발탁할 수 없다. 6개월 후 인사 때에 호남출신들을 배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주선은 그 인사안에 대해 단호히 거부권을 행사하고 외직 근무자도 포함된 인사안을 다시 제출하게 함으로써 호남출신 인사들이 중앙부처 본부 고위직에 다수 포함되는 인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소문이 각 부처에 퍼지자 모든 부처가 소외받던 호남출신 공직자들을 배려하여 균형을 갖춘 인사안을 마련하여 청와대에 제출하였다. 1998년 어느날 과거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검창총장을 지냈던 영남출신 인사가 “‘지금 청와대에 있는 사람중에서 박주선이 제일 훌륭한 재목이다’고 시중에 여론이 파다하다”고 격려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깊은 신뢰-

“박주선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

대통령은 박 비서관에게 탁월한 능력과 자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업무처리 자세 등을 칭찬하며 각별한 애정과 신임을 공개적으로 표방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 비서관에 대해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고까지 한 말은 기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여러 좌석에서 박 비서관을 ‘자신이 만난 최고의 검사’라고 극찬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개혁에 앞장서는 박 비서관에 대해 야권에서는 정치적 공세를, 여권 내에서 조차 그의 원칙에 입각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에 시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렴’과 ‘강직’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던 박주선은 전국을 뒤흔든 ‘실체없는 옷 로비 사건’에 뜻밖의 유탄을 맞고 말았다.

그가 대통령에게 이미 보고를 했고,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내사 보고서를 사건 당사자이면서 사정최고 책임자인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언론과 야당은 일제히 그를 김 전총장과 공범으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장본인으로 몰고 갔다.

박주선 스스로가 해명을 하고 김 대통령마저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고 그가 한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노도(怒濤)와 같은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는 사건의 ‘진실’ 보다는 이 광풍(狂風)을 잠재울 속죄양(贖罪羊)이 될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했다. 결국 ‘개혁의 집행자’ 박주선은 사표를 내고 진실 앞에 서기로 했다.

김 대통령이 “아무 문제가 없으니 계속 일하라”며 한사코 사표를 반려했지만 그는 광풍이 대통령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해 스스로 법무비서관직을 물러나 온몸을 던져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을 지켰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옷사건의 진실은 거악(巨惡)으로 상징되는 부패한 재벌이 자신들을 단죄(斷罪)한 박주선과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게 복수를 위해 벌인 자작극(自作劇)인데도 엉뚱하게 그 불똥이 박주선에게 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 그의 아버지는 초로 날개를 만들어 이카루스에게 붙여줬다. “이 날개로 절대 높이 날지 말아라.” 그러나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태양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마침내 태양의 열기가 날개를 녹였을 때 그는 지상으로 떨어졌다. 박주선은 청렴과 강직으로 솟아올랐지만 거세개탁(擧世皆濁)으로 부패한 사회는 그런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에 떠밀려 억울하게 구속까지 된 박주선은 지금까지 별로 무관심했던 운명(運命)과 사주팔자(四柱八字)소관이란 옛 어른들의 말이 새삼스럽게 실감났다.

“큰 일을 할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시련을 내린다”

검사가 직업이라 수많은 사람들을 영어(囹圄)의 몸이 되게 했던 박주선이 감옥에 가리라고는 본인은 물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박주선은 한 평 밖에 안되는 좁은 공간에서 지내면서 50평생 살아온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悔恨)과 함께 그동안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많은 죄인을 구속시킨 검사로서 일반인이 구속된 것과는 감회가 달랐을 것이다.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박주선을 면회 온 검찰 선배가 “큰 일을 할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시련을 내린다”는 맹자의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란 구절을 인용해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맹자』 고자하(告子下)편을 보면 “앞으로 큰 일 할 사람은, 그 큰 일을 감당해 나갈 만한 굳은 의지를 갖기 위해 먼저 심신단련에 필요한 고생을 시킨다.” 즉 그의 마음과 생각을 먼저 고달프게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순(舜)임금 같은 성군도 밭농사에서부터 출발했고, 부열같은 은(殷)나라의 명재상도 성벽을 쌓는 인부에서 등용되었으며, 교격(膠隔) 같은 어진 신하도 생선장수의 몸으로 문왕(文王)에게 발탁되었고, 제환공(濟桓公)을 도와 패천하(覇天下)를 한 관중(管仲)도 옥중에 갇혀 있던 몸으로 등용되었으며, 초창왕(楚昌王)을 도와 패천하를 한 손숙오(孫淑傲)도 바닷가에 숨어 사는 가난한 선비로 천거를 받았고, 진목공(秦穆公)을 도와 패천하를 한 백리해(百里奚)는 팔려 다니던 몸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큰 소임을 사람에게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며, 그 힘줄과 뼈를 고달프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困窮)케 하여, 행하는 일마다 의지와 엇갈리게 한다.

이로써 마음을 분발케 하고 인내심을 강하게 하여 지금까지 그가 능히 하지 못했던 일을 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맹자는 이어서 “이로 미루어 사람은 우환(憂患)에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차기 검찰총장감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박주선은 억울함에 몸을 떨면서도 이 구절이 좁은 공간의 감옥 생활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석방된 직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평 감방에서 세상이 크고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의미심장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반개혁 세력 음모의 희생양” 된

억울한 박주선

박주선을 형처럼 따르던 유력 일간지의 한 정치부 기자는 못 먹는 폭탄주를 마시며 ‘상 받을 사람이 벌 받는 현실’을 개탄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박주선의 몰락은 김대중 정권의 방패막이가 사라졌음을 뜻한다”고 비판했다. 현실적으로 국민의 정부를 상징하는 개혁(改革)과 사정(司正)의 견인차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소수정권의 비애(悲哀)였고 소수세력이 지닌 한계였다. 정권을 잡았어도 국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설적 아이러니였다.

특히 거악(巨惡)이었던 재벌의 온갖 유혹과 로비스트로 변한 친지들과의 인간관계까지 훼손하면서 엄정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상(賞)을 받아야 할 박주선이 벌(罰)을 받아야 한다는데 공분(公憤)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세간에서는 당시 현 정권의 실력자 가운데 신동아 재벌의 로비에 안 넘어간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과 박주선 법무비서관, 그리고 김태정 검찰총장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한 박주선이였다.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살이였다. 박주선은 1999년 12월 21일 검찰에 의해 상상할 수 없었던 구속을 당하였다. 더구나 이 사건에 편승한 반개혁적 기득권 세력들이 꾸민 「박주선 죽이기 시나리오」가 감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차기 검찰총장감은 물론 차세대의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개혁 집행자 박주선’을 이 기회에 제거해 버리자는 음모가 작용해 김대중 정권의 ‘개혁의 전사(戰士)’를 억울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주선은 검찰에 출두하면서 「박주선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자신을 프랑스 군부에서 유태인으로 차별대우를 받아 무고하게 스파이 혐의로 구속됐다 13년만에 복권됐던 드레퓌스 대위의 고뇌(苦惱)를 거론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제물이 될 것을 선언했다.

“저는 4천억원이 넘는 국민의 재산을 편취하고 해외로 빼돌린 ‘부도덕한 재벌’ 총수의 죄악(罪惡)을 밝혀 단죄(斷罪)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악덕 재벌이 꾸민 거대한 음모의 덫에 걸렸음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단죄하려 했는지에 대한 사회적 착시(錯視)현상에 망연해 할 따름입니다. 할 말은 많으나 사필귀정을 믿습니다. 진실을 외면당하는 억울함에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몸을 떨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반(反)개혁 기득권(旣得權)세력의 온갖 저항과 방해 속에서도 IMF 국난을 극복하고 개혁의 대장정(大長征)을 이끌고 계시는 대통령님의 업적과 성과가 이 문제로 퇴색되고 희석된 현실에 죄송함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역사와 시대가 제물(祭物)을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모셨던 대통령님과 국민의 정부를 위해서라면 이제 한 몸 당당히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제가 믿는 역사의 신(神)이 진실을 밝혀줄 것입니다.”

박주선은 새 천년을 구치소에서 맞고 2000년 1월14일, 구속 25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석방된 직후 박주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억울한 일을 당해 가슴 아프다. 나도 옥살이는 물론 사형선고를 받고도 이렇게 일어서지 않았느냐. 그간의 고생을 위안으로 삼고 힘을 내 일어서라. 반드시 전화위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 박 비서관에 대한 애정의 정도를 짐작케 했다.

광풍이 사라진 후 각 언론사들도 지난날과는 180도 달라져 박주선 구속에 문제가 있었고 ‘그가 정치적으로 희생됐다’는 보도를 계속 쏟아냈었다. ‘옷로비 사건’은 박주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보도들이었다.

'무죄판결’로 진실 밝혀진 옷로비 광풍 -

DJ정권 최대의 정치적 희생양 박주선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을 구속시킨 이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의 광풍은 2년 여 동안의 재판을 통해 ‘신동아 그룹 회장 부인의 자작극’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박주선에 대해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정의는 박주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전 통일부장관 부인 배모씨의 거짓말과 신동아 그룹회장 부인 이모씨의 오해가 빚은 ‘실체없는 사건’이라면서 박주선 전 법무비서관의 보고서 유출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2001.11.5)하였다. 법원은 또한 “박주선은 옷로비 의혹을 엄정히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이 인정된다” 라고 판결문에서 판시하였다. 검찰은 1심 무죄 판결에 대해 항소조차 포기하였다. 이는 검찰이 박주선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반증이었다. 또한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게도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2003. 12. 29)하였다.

국민의 정부 최대 의혹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옷로비 의혹사건은 결국 ‘실체없는 실패한 로비’를 놓고 당시 야당은 사실을 조작했고, 언론은 허위 과장보도를 일삼아 국정을 마비시키고, ‘법대로’여야 할 검찰은 여론에 장단 맞춰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으로 구속시킨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직동팀 내사, 검찰 재수사, 국회 국정조사, 특별검사 수사, 또 검찰 수사, 재판 등 6차례에 걸친 조사나 수사를 했으나 결론은 모두 ‘실체없는 실패한 로비 해프닝 사건’으로 밝혀졌던 ‘옷로비 의혹 사건’. 반개혁 수구 기득권세력들의 반동을 틈탄 권력 실세들은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들은 박주선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있었던 이사철 전 의원은 박주선 법무비서관의 구속에 대해 “대한민국이 아까운 검사 한 사람을 잃었다”며 통탄해하는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주선은 업무능력이 우수할 뿐 아니라 자세가 청렴하고 소탈하다. 한마디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초임 검사 시절부터 전별금이나 떡값 등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청렴하다고 내세우지도 않았다. 선이 굵고 확실한 사람이다.”고 술회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옷로비 광풍에 희생된 박주선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자신도 얼마나 상심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있다. 김 전대통령은 무죄 판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박주선에게 직접 전화해 “축하한다. 그러나 이 억울함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실체도 없는 옷로비 의혹이 국정의 발목을 잡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것을 생각하면 참담한 심경이다. 나를 보고 힘내라”고 격려하면서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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