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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박주선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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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DJ 정권의 심장부를 노려라

작성일09-10-21 17:53 조회3,750회 댓글0건

본문

 

Ⅱ.DJ 정권의 심장부를 노려라


1.‘첫 구속과 무죄’ 옷로비 사건의 진실

박주선의 첫 번째 구속과 무죄는 DJ정권 초 발생한‘옷로비 사건’과정에서 일어났다. ‘옷로비 사건’은 보수기득권세력의DJ정권에 대한 반격이 본격화된 사건이었다.
97년 대선은 여당과 야당 두 정치세력에 국한된 권력쟁탈전이 아니었다. 50여 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수구보수·기득권 세력과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두 진영 간 갈등과 불신, 대결구도는 끝나지 않았다. 언제라도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처음으로 야당 신세가 됐지만 한나라당은 여전히 과반이 넘는 국회의 지배세력이었다. 야당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협력보다는 가파른 대치전선을 형성, 사사건건 국정 발목잡기에 나섰다.
옷로비 사건은 국민의 정부 집권 2년차에 발생했다. ‘실체 없는 사건’이었지만 팽팽한 대치전선의 한가운데 던져지면서 사활을 건 투쟁으로 발전했다.
옷로비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국민들의 분노와 감정을 자극하기에충분한‘흥행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는 재벌의 권력을 상대로한 로비 의혹이다. 재벌과 권력 간 은밀한 뒷거래가 아니냐는 것이다.또 하나는 고위 공직자 부인들의 호화 사치생활의 일면이 드러났다
는 점이다. 물론 실상을 보면 그 쇼핑이 호화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 부인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고급 옷 가게를 드나들었다는 점은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당시는 IMF 경제위기로 서민과 중산층의 고통이 극에 달해있던 시점이었다. 사리를 따지기에 앞서 욕지기부터 나올 만큼 말초신경을 자극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전선에, 국민정서를 자극할 소재가 주어졌을 때 이 사건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며 마녀사냥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박주선의 첫번째 구속과 무죄는 그 광풍의 정점에서 이뤄졌다.
이를 제어할 집권세력의 역량은 보잘것이 없었다. 마녀사냥에 굴복한 결과 또한 참혹했다. 정국 주도권은 야당으로 넘어가고 집권세력의권력기반은 급속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다음해 2000년 총선을 거치며 한나라당 내에선‘이회창 대세론’이일찌감치 시작됐다. 물론 이것이 2002년 대선에서의 패배의 한 원인이 됐지만 이회창 대세론의 힘은 컸다.이회창은 3김에 못지않은 제왕적 총재로 군림했고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은 물론, 공직사회까지 한나라당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한나
라당의 동의가 없으면 국회는 한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옷로비 사건을 계기로 바야흐로‘집권 야당의 시대’가 시작됐다. 팽팽한 대치를 해오던 권력의 균형추가 야당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실체 없는 로비’의 진상
피해자가 가해자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었다. 진실이 거짓으로매도됐다. 로비를 시도한 자의 말은 진실이 되고, 로비를 거부했던 자의 말은 거짓이 됐다.
음모와 왜곡이 만들어낸 마녀사냥의 광풍이 한때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들어선 국민의 정부에서다. ‘옷로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을 거짓으로 바꿀 힘을 가진 집단이 누굴까. 권력의 힘만으로는이제 불가능하다.
2005년 공개된 안기부 도청자료 X파일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재벌과 특정정치세력, 그리고 언론의 결합. 그들이라면 가능하다.
X파일을 통해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인‘정-경-언-검’의 유착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그룹 이학수와 중앙일보 홍석현이 마주 앉아 국민의 선택을‘그들의 선택’으로 바꾸기 위한 거대한 음모를 꾸민 현장이 공개된 것이다.두 사람은 특정 후보에 대한 자금 지원, 언론의 특정후보 편들기, 검찰에 대한 떡값 배분을 놓고 긴밀하게 협의했다. 사회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기 위한 특정정치세력과 재벌, 언론의 유착구조였다.이들의 유착구조는 군사독재 시절과는 질을 달리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게 아니다. 독재시대 권력이 중심에 서고경제계와 언론이 마지못해 따라가던 시대는 끝났다. 정치권력과 경제
계, 언론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강도가 더 높아진’커넥션을 형성했다.
그렇지만‘국민의 뜻’을 왜곡해‘그들의 정권’을 세우려던 노력은좌절됐다. 9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기득권 세력의 결탁구조는 97년 대선이 끝난 후에도 굳건하게 이어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게 2002년 대선이다. 한나라당의‘차떼기’로 모양을 바꾸어 등장했다.
기득권세력연합은 DJ정권 내내 작동했다. DJ정권 출범 초 그들은잠시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들은 정권을무력화시키기 위한 공동전선을 펼쳤다.

그때 그들 앞에 먹잇감이 나타났다. 옷로비 사건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려 진실을 왜곡하고, 정권의 기반을 허물기 위한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사건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상관없었다. 국민의 정부를 흔들기 위한목적에만 충실하면 됐다. 그들에겐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진실인양호도할 힘이 있었다.

재판부“박주선, 원칙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했다”
집권 초 DJ정부는 비교적 높은 국민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금모으기 등 범국민 운동을 통해 IMF 경제위기를 해소하고, 공직기강과세력교체를 통해 사회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반DJ, 반개혁세력은 공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민심과 함께 가는 정권에 대한 도발은 위험하다. 정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국민에대한 선전포고가 될 수 있다. 아무리 힘이 센 세력이라도 감히 도전할
수 없다.
정권과 국민 사이에 균열을 내야 했다. 취임 첫해 1998년 말부터 그시도가 나타났다. 집권 1년여가 지나면서 일부 언론에서 인사 편중 시이다. 특혜를 누려오던 세력은 상실의 아픔을 느끼며, 정권교체를 피
부로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시도는 무산됐다. 지역편중, 호남편중의증거를 찾기 위해 샅샅이 뒤졌지만, 그 증거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당시 인사 추천과 검증은 박주선이 맡고 있었다. 박주선은 그간의
영호남 지역 간 불균형 인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소신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역편중으로 흐르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잘못된 인사의 시정에 주력했지, 특정세력의 특혜는 용납하지않았다.
호남 편중 인사는 DJ정권 말기 큰 짐이 됐다. 정권 초기 균형인사의 원칙은 무너졌다. 동교동계 등 실세들이 국정에 개입하면서, 원칙이 무너지고 정실과 연고 인사가 판을 친 결과였다.
보수 기득권세력연합이 DJ정권 타격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옷로비 사건이 터졌다.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달려들었다. 정권과 민심 간 균열의 틈새를 발견한 것이다.
옷로비 사건은 사직동팀의 내사를 시작으로 정치공방으로 비화되면서‘검찰 수사 - 국회 청문회 - 특검 -검찰 재수사’라는 과정을 거쳤다. 나라가 온통 들썩거렸다. 하지만 이미 사직동팀의 내사단계에서
진실은 가려졌다. 실패한 로비였다.
야당과 언론은 이 진실을 가렸다. 그리고 엄청난 로비가 있었던 것인양, 대형 권력형 비리로 몰아갔다.
로비를 시도하다 실패한 자와 로비를 거부한 자, 누가 정의로운가.
그러나 이는 뒤집혔다. IMF 위기상황에 따른 국민정서를 교묘히 이용한 야당과 언론, 여기에 시민단체까지 가세하면서 국민여론은‘로비를한 자의 편’으로 쏠렸다.
집권세력의 대응은 미숙했다.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 그 결과는 박주선이라는 희생양을 내주고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타협과 평화가 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약점을 보인 이상 그냥 놔둘리 없었다. 한번 등을 보인 자는 다시 정면승부에 나서지못한다.
그렇다고 진실이 바뀔 순 없었다. 진상을 들여다 보면 허망하다.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외회밀반출 혐의로 사법처리될 위기에 놓인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의 구명을 위해 전방위 로비를 펼쳤지만 최순영은 1999년 초 구속됐다. 로비는 실패했다. 소위 권력 실세 중 연루됐거나,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라를 1년간 떠들썩하게 했으니 그에 상응한 단죄가 있어야 했다.
이 사건과 관련 구속 기소됐던 김태정, 박주선은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 유죄를 선고받은 이는 김태정의 부인연정희,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 등이다.
모두 국회에서의 위증 혐의였다. 본질과는 거리가 먼 지엽말단적인부분에 대해 상반된 진술을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금품 수수나 청탁 등의 로비가 입증된 게 아니다. 단지 검찰에서의 증언과 국회 증언
과정에서의 말이 달랐다는 점이‘죄’였다.
재판부의 선고는 이번 사건의 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1년11월 5일 박주선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옷로비 의혹 사건은 강인덕, 정일순, 배종숙씨가 이형자씨와 연정희씨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
려다 실패한 사건”이라며“억울하게 사직동팀 조사를 받는 등 고생을했다”고‘옷로비 사건의 실체는 없다’로 결론 내렸다. 박주선에 대해서도“옷로비 의혹 사건에 대해 원칙적이고 철저한조사를 진행했다”고 오히려 그의 업무처리를 칭찬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주장하고 검찰이 기소했던 축소·은폐 의혹이나 조작이 없었다
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꾸로 철저한 내사를 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도 없는 사건을 가지고 나라와 정권의 안위를 흔든 세력이 단죄를 받아야 한다. 아니 최소한 대국민사과라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관련 반성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건의 진행과정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연 어떤 세력이 어떤 의도로 이만큼 사건을 몰아갔는가가 중요하다.
각본을 쓰고 연출에다 주연까지 맡은 세력은 야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마녀사냥극이었고, 사기극이었다. 여론이 움직이자 시민단체, 검찰, 심지어 집권세력에서까지 동요해 조연을 담당했다.

특검이 밝힌 진실
옷로비 사건의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게 특검이었다. 특검의조사는 의혹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검 최병모는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역시 특검의 의혹 부풀리기와 언론의 조작이었다.그 이면에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공명심에 눈이 멀어 국민여론에 영합했던 일그러진 행태가 자리잡고 있었다.
특검에 특별수사관으로 참여했던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소속의 변호사 문병호가 특검이 끝난 직후 특검의 잘못을 폭로하는기자회견을 준비하다 포기한 일이 있었다. 의혹이라고 할 만한 대목
이 모두 근거가 없는 거짓이라는 점을 폭로하려 한 것이었다. 민변의만류로 기자회견을 취소했지만 그후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옷로비 특검의 진상을 알 수 있는 증언을 했다.
그의 증언은 옷로비 수사가 근본적으로‘진실과 거짓의 전도’라는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자회견 동기에 대해) “특검의 수사결과를 보고 경악해서였습니다. 내가 보기에 검증 안된 내용들이 사실인 양 발표문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특검보였던 양인석 변호사가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이 검찰수사를 받던 98년에 신동아그룹 고위간부의 변호를 맡았던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검의 수사발표 직후 혼란에 빠진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민변측에서‘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으며 특검제의 존립을 위협할 수도 있다’며 말렸어요.”
“이형자씨는 1월 7일경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연정희씨를음해하기 위해서였죠. 연씨의 코트 반환 날짜가 1월 8일이니. 그러면조사 나오는 것 알고 반납한 게 되니까. 자기 말로는 1차 조사를 햇불
선교원에서 받고 2차 조사는 63빌딩 회장실에서 받았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씨의 안사돈 조복희씨가 이씨와 두 번 다 같은 날 조사를 받았거든요. 조씨한테 물어보니 63빌딩에서 1차 조사를 받았어요. 날짜가
1월 15일이고. 첫 번째는 진술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1월 19일 햇불선교원에서 받았어요. 사직동팀 내사기록에 있는 진술서에도진술날짜가 그렇게 돼있어요. 그럼 상식을 가졌다면 이형자씨가 거짓
말하는 것으로 보고 이씨를 쪼아야지. 그런데 거꾸로 조씨를 쪼아대는겁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 그렇지 이형자씨(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 부인)가얼마나 거짓말한 줄 압니까. 조사가 1월 7일경 시작됐다는 걸 주장하는근거로 송 목사라는 증인을 댔어요. 송 목사가 1월 11일 미국으로 출
국했는 데 출국 3~4일 전 햇불선교원에 갔다가 이씨가 조사 받는 걸봤다는 겁니다. 외무부 여권과에 확인해보니 송 목사는 1월 말에 출국했어요. 송 목사도 특검에 와 이씨의 말을 부인했고. 그 여자가 큰일
낼 여자입니다. 아주 웃기는 여자예요.”
“같은 거짓말이라도 이형자씨의 거짓말은 아주 죄질이 나빠요. 연정희씨와 정일순씨의 거짓말은 도덕적 비난이 두려워서 한 방어적인거짓말입니다. 그에 반해 이씨의 거짓말은 남을 음해하려한, 적극적
이고 공격적인 거짓말로 보입니다.”
“최(병모) 특검이 홍보를 담당한 게 실책이었어요. 그 바람에 최 특검은 수사팀에서 완전히 배제됐어요. 최 특검은 수사내용과 관련해한번도 보고 받은 적도, 지시한 적도 없습니다. 기자들이나 만나고.
양인석 특검보에게 수사 전권을 넘긴 건 최 특검의 실수였습니다. 수사 내용을 모르니 수사 방향을 균형 있게 이끌지 못했습니다.”(<신동아> 2000. 2월호)

야당은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집권 1년은 통상 허니문 기간으로 불리운다. 야당은 물론 언론도 정쟁과 비판적 보도를 잠시 접고, 국정운영을 위한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97년 선거에서 패배한 야당은 그렇지 않았다. 50여 년간 권력을 누려온 세력을 대변하는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와 DJ집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허니문은커녕 대결과 정쟁의 길로 치달았다.

거대야당의 횡포
그 첫 대결은 JP의 총리직 인준을 놓고 벌어졌다. 총리인준은 정부로서 정상 기능하기 위한 첫 단추다. 이를 저지하고 나섬으로써 새 정부의 정상적 작동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아가고자 했다.
JP 반대는 곧 대선 결과에 대한 불복이었다. DJP연합에 의한 대선승리는 정치적 인준이었다. 한나라당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대통령에 DJ가 당선됐지만 국회는 한나라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총의석 299명 중 165석이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과반을 훨씬 넘는 거대야당이다. 그러나 이 힘을 당면한 경제위기 극복과 국정 안정을 위해사용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JP가 총리 인준을 받은 것은 1998년 8월 17일이다. 2월말 총리로지명된 후 5개월하고도 20여 일 만이었다.
DJ정권은 한나라당이 인준을 거부함으로써‘총리서리체제’로 기형적 국정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총리 추천에 의한 내각 구성의 적법성, 총리 서리의 위헌 여부 등이 정치쟁점화됐다. 정치
적 제스쳐가 아니라 실제 국민의 정부 국정운영 마비를 노린 공세였다.
한나라당은 JP가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 정치인이라는명분을 내걸었지만 속내는 정치적 계산 따른 결론이었다. ‘JP 총리체제가 들어서면 한나라당이 바로 와해 위기에 처할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의원들 개개인의 정치생명이 위험해진다’는 계산이었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은 보수안정 희구층이었다. JP는 보수원조를 자처할 정도로 보수층의 지지 위에 서 있었다. 한나라당과 지지층이 겹친다. JP의 집권으로 보수층의 이동이 일어나 당의 기반 자
체가 붕괴될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당리당략이었다.
DJ가 직접 나서서“6·25 이래 최대의 국난에 처한 상황에서 거대야당인 한나라당의 책임은 여당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총리 인준에 협
력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소귀에 경읽기였다.
대통령 권력은 뺏겼지만 의회권력은 자신들의 손에 있었다. 이 의회권력의 힘을 보여줘 대통령으로의 중심 이동을 막고자 했다. 한나라당은“반드시 콧대를 꺽어놓아야 한다”고 비타협적 투쟁의지를 불살랐다.
당시 상황은 IMF 경제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한나라당의JP 총리 인준 거부에 대한 국제적 시각을 당시 미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1998. 3. 16일자)에서 보면 잘 알수 있다.
‘낡은 형식의 정치가 새로운 한국을 침몰시킬 수도 있다’는 제목의서울발 기사에서“한나라당은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급진적인개혁을 하려는 김대중 정부의 노력에 맞서려 하고 있다”며“이같은 교
착상태는 한국정치를 혼돈에 빠뜨리고, 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켜그의 위기 관리 능력을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잡지는“김 대통령이 강한 국제적 지지와 대선 때 변화에 대한 위임을 받고 있으나 한나라당은 주요 개혁을 입법해야 하는 국회의 과반수를 갖고있다”며 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파벌에 찌든 한나라당이 개
혁을 지원하기보다는 과반수 세력을 잃지 않을까 더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끝으로“파당정치는 현재 한국이 결코 누려서는 안되는 사치”라고 결론내렸다.
위기를 한나라당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눈을 감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곧바로 시작된 이회창의 정권 재탈환 작전
이회창이 당에 복귀하면서 대결과 투쟁을 통한 정권재탈환 작전이본격화됐다.
대선 직후 조 순에게 당권을 넘겨주고 잠시 2선으로 물러났던 이회창은 바로 당권 회복에 나섰다. 김윤환과 연합, 조 순에게‘조기 총재경선’을 요구, 마침내 1998년 8·31 전당대회를 통해 총재로 복귀했
다. 이후 여야간 가파른 대치가 이어졌다.
‘세풍사건’은 국가공권력을 특정정치세력의 집권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세풍은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서상목이 이회창의 대선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세청장, 차장과
공모해 국세청을 동원했던 사안이다. 사실상 국민의 세금을 불법적으로 갈취해 한나라당 대선자금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회창, 서상목과국세청 청장이었던 임채주, 차장이었던 이석희가 모두 경기고, 서울대
동문 출신이었다.
세풍은 다른 불법 대선자금 사건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국가기관을 이용한 불법 비리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DJ는“용서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라고 강력한 사정의지를 밝혔다.
이회창 측은 이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를 정쟁화함으로써 돌파하기로 작정했다. 이때 이회창은“죽을 각오를다하고 이 정권과 싸우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야당 파괴 공작, 이회창 죽이기로 규정하고 장외투쟁과 의원직 사퇴불사론 등 강경투쟁 일변도로 내달렸다. 심지어 한나라당은 수사 중단과 함께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정권퇴진
투쟁 불사’운운의 말이 이때부터 나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기국회를 볼모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야당과 검찰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99년 1월 국회는 여야의원 10명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검찰은“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이 뇌물 면허장이냐”고 맞받아쳤다.
4월 한나라당은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표결결과찬성 145 반대 140으로 의결 정족수인 재적과반(149)에 미달돼 부결됐지만, 한나라당의 기세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이에 대해 국민여론과 언론보도는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당시 한언론의 한나라당 장외투쟁에 대한 의견이다.
한나라당이 장외투쟁을 한다 해도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결코국회만은 포기해선 안된다. 따질 일이 있으면 국회를 통해 따져야한다. 투쟁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투쟁일 때 명분이 있지 정파나개인을 위한 투쟁은 국민의 지지는커녕 동정도 받을 수 없다.
또 사정문제와 국회운영을 연계시켜선 안된다. 동료의원들에대한 체포동의안도 우선 검찰조사에 응하게 한 다음 대처방안을강구할 일이다. 죄가 있으면 법에 따라 재판을 받으면 된다. 법을만드는 국회의원이 법을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면 누구더러 지키라고 법을 만든단 말인가.(<경향신문> 1998. 9. 10일자)
한나라당의 극한투쟁은 DJ 정부 출범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이어졌다.99년 들어서면서 옷로비 사건이 터졌다. 국민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한나라당에겐 횡재였다. 즉각 진상규명위를 구성하고 의혹 부풀
리기와 정치공세에 나섰다.
한나라당의 공세는 8월 청문회까지는 의혹 부풀리기와 정치공세, 이후 박주선의 구속까지는‘박주선 죽이기’로 진행됐다.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혀 정권기반을 허물고, 정권의 핵심인사를 제거함으로써
DJ정권의 힘을 빼는 2단계 작전을 펼쳤다.
옷로비 사건은 재벌의 로비가 있었다는 점과 고위공직자들의 부인들이 몰려다니며 고급 옷 쇼핑을 했다는 점에서 국민정서를 자극했다. 한나라당의 의혹 부풀리기는 이 점에 모아졌다. 진상규명위의 명칭도
‘장관부인 호화의상 뇌물 사건’으로 명명했다. 이때 위원장을 맡았던이가 2002년 대선 뒤 한나라당을 탈당,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후 참여정부에서 정부기관 산하단체장을 맡고 있는 이우재다.
한나라당의 공세는 거셌고 금도가 없었다. 대변인이었던 안택수는“국민들은 IMF에 신음하는데 고관부인들은 고급 의상으로 몸을 휘감고 있다”고 국민정서를 자극했다. 또“이번 사건은 대통령이 알고도 모
른 척한 한국판 워터게이트”라고 DJ를 비난했다. 이회창은“김대중 대통령은 당, 국정원, 검찰의 뒤에 숨어있을 것이 아니라 전면에 나오라”고 공세를 펼쳤다.
한나라당의 정치공세가 의혹 부풀리기에 불과했다는 점을 보여준대표적인 경우가 8월에 있었던 청문회였다. 청문회에서 밝혀진 것은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옷을 샀느냐, 언제 샀느냐라는 여염집 아낙네
들의 사생활이나 시시콜콜 따지는 일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졌다.
청문회 후 세간에는“청문회의 최대 성과는‘앙드레 김’의 본명이‘김봉남’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란 비아냥이 나왔다. 청문회에증인으로 출석한 앙드레 김이 본명을 밝힐 수밖에 없어 그의 촌스런이름이 전국민에게 공개된 것이다.
이같이 근거 없는 정치공세와 의혹 부풀리기가 1년여 정국을 뒤흔든 데는 우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언론이었다.

어느 검찰 출입 기자의 양심선언
옷로비 사건에 대한 보도가 열기를 뿜고 있을 즈음, 당시 한 검찰 출입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우리 언론보도는 마녀사냥이었다. 검찰 기자실에서 기자들이 의견일치를 본 것은 연정희씨는 잘못이 없다, 의혹이라고썼지만 의혹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언론은 이 진실을 진실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위 기자는“광풍이 몰아칠 때 기자 한 개인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실토했다.
진실은 의혹도 죄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 진실을 외면했다. 연일 로비 의혹, 권력형 비리, 거짓말, 호화 옷 쇼핑, 축소 은폐의혹이 지면을 도배했다.
언론은 입만 열면 공정보도, 정론직필을 내세운다. 국민의 알 권리와언론의 자유를‘전가의 보도’로 휘두른다. 그러나 거기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과 공공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옷로비 보도는 진실을 거짓과 맞바꾸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뒤바뀌었다. 어느 한쪽의 유불리를 계산해볼 수 있는 편파보도 수준이 아니었다. 대국민 사기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때로는 보수야당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상승작용도 이뤄졌다. 야당의 무책임한 정치공세를 언론에서 키우고, 언론의 근거없는 의혹 부풀리기는 야당에 의해 증폭됐다. 진실과는 관계없이‘그들만의 리그’
에서 의혹을 키워갔다.
언론 역시 국민의 정서라는 측면에서 거칠게 없었다. DJ가 말했듯“옷로비는 실패했지만 고위 공직자 부인들이 국민이 IMF 사태로 고통받고 있는 와중에 고가 옷을 구입하러 몰려다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이 1년여를 그 많은 지면을 할애해 보도했던 의혹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과나 해명을 한 언론사는 한군데도 없었다. 누가 피해를 보든, 국가적 이익이 손상을 입든
말든 한번 지나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특정정치세력과 언론의 유착
특정정치세력과 언론의 유착관계는 역사가 깊다. 97년 대선 사례를보자.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을 무산시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보려는 대열의 선봉에 언론이 있었다.
가장 노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신문은 X파일의 주역인 중앙일보였다. 신한국당 경선에서부터‘친이회창’성향을 드러냈던 중앙일보는이인제 죽이기와 DJ죽이기의 선봉에 섰다.
‘YS-DJ 밀약설’(10. 22일자)‘김영삼 대통령, 이인제 밀었다’(10. 24일자), ‘청와대, 국민신당 창당 지원’(11. 4일자) ‘신당에 현철커넥션 있다’
(11. 6일자) 등의 기사를 연이어 실었다. ‘이인제 = YS’이미지를 부각해이인제의 상승세를 꺾으려는 이회창 측의 선거전략과 일치하는 흐름이다.
10월 17일자‘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제목의 한 칼럼은“DJ 지지자는 많아야 35%선이라는 한계를 지닌다”고 주장, DJ에 대한 반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 와중에 중앙일보가 이회창을 조직적으로 지원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전략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대선을 3일 앞둔 12월 15일자 1면에‘대선 양자구도 압축’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선거직전‘여론조사 공표 금지’라는 선거법까지 위반한 이 기사는 이인제를 죽이고 이회창을 양자구도로 끌어
올리려 의도된 기사였다.조선일보도 그에 못지 않았다. 중앙일보가‘반DJ표’결집을 위한
이인제 때리기에 치중했다면 조선일보는 DJ를 정조준했다.
‘DJ 비자금의 약효’(10. 11일 칼럼), ‘이회창의 선택’(10. 18일 칼럼)
등을 통해 DJP연대를 비난했다. 조선은 DJ의‘IMF 재협상’발언을겨냥 12월 11일 1면에“정치권‘IMF 재협상’발언 외화난 악화 부채질”이란 기사를 실었다. 이후 DJ의 재협상 발언이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렸다고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맹공을 가함으로써 막판 쟁점이됐다.
동아일보도 이같은 편파보도의 비난에서 피해갈 수 없다. 동아일보는 신한국당 전당대회와 관련‘3김시대 마감 선언’등의 제목을 달았다가 언론단체들의 편파보도 지적을 받았다. 또 DJ에 대한 색깔론 시비를 일으킨‘한국논단’의 주장을 비중있게 보도했다가 당시 정치부장이 교체되는 홍역을 치렀다.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서 흘러나온 내부 문건은 한나라당과 특정언론의 유착관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문제의 문건은 조선·중앙일보를‘우호신문’으로 규정, “100% 활용방안을 모색해야한다”고했다.
그들이 역사적 흐름을 돌려 막고자했던 것은 DJ정권 출범이었다. 옷로비 사건이 한나라당에게 정국 흐름을 바꿀 횡재였다면, 언론 역시 정권의 무력화를 위한 총공세의 횡재였다.
신동아그룹 회장 최순영은 1999년 2월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여권의 입장은 단호했다. 청와대 청원이 있어 이 사건을 조사했던 박주선도‘구속수사 해야 한다’는 결론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신동아 측은 외자유치를 명분으로 사법처리가 지체되는 사이 구명을위한 전방위 로비를 펼쳤다.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에 대한 옷로비 의혹도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최순영의 부인 이형자가 연정희를 상대로
로비를 시도했다. 그렇지만 로비는 먹히지 않았다.
사법처리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최순영 측은 최후의 수단인‘물귀신작전’에 나섰다. 옷값 대납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사법처리 된다는 역선전을 펼쳤다. 이 소문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사
직동팀이 조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옷로비 사건의 핵심은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검찰총장 부인연정희에게 옷으로 로비를 했는지, 또는 연정희가 그것을 빌미로 이형자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했는지 여부였다. 수사 결과, 옷값 대납 요구를 한 적이 없음이 밝혀졌다.
조사 과정에서 연정희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형자가 흘린 유언비어를 방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언론의 집요한 공격을 불렀다. 그렇지만 이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지언정, 사법적 심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형자는“옷값 대납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최 회장이 구속됐다”는취지의 주장을 폈다.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안 대줬다는 이유로 재벌회장을 구속한다? 뒤집어 말하면 옷값을 대납했다면 최순영의 구
속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이것이 상식이다. 정상적 사고와 판단을 하는 사회라면 당연한 결론이다. 그렇지만 삼척동자도 알만한 이런 상식조차 비상식적인 것이 돼버렸다.
언론은 이형자의 비합리적 주장의 허구성을 짚지 않았다. 언론의방향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상식과 진실을 가리는 마녀사냥만이 남아있었다.
과거사 정리가 참여정부에서 본격화됐다. 그 대상에 언론이 낀다면 옷로비 사건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과거로 남을 것이다. 당시 한 원로언론인의 자성은 우리 언론의 현주소와 이들이 어떻게 옷로비 사건을왜곡시켰는지를 절절히 보여준다.
이 글을 쓴 김성우는 경남 통영 출신으로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을지내는 등 44년간을 언론계에 근무했던 인사다.
우리 신문들의 선정주의는 어느 신문도 거의 예외없이 담합이라도 한 듯이 꼭 같다. 이것이 우리 떼거리 저널리즘의 희극이요, 비극이다.
예를 들어보자.
1999년에 소위‘옷로비 의혹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검찰총장부인에게 옷로비를 하려다 실패했다고 어느 재계 인사의 부인이실토한 것을 가지고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로 떠들어 댔다. 지칠줄 모르는 이른바 여론의 기세에 마침내는 특별검사가 임명되는가하면 그것도 못 미더워 국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렸다. 근 반 년 동안
나라가 이 사건 하나로 들썩거렸다. 그런 끝에 나온 결론은‘혐의없음’이었고‘옷로비를 하려다가 실패했다’는 것 뿐이었다.이 사건은 처음부터‘옷로비를 하려다 실패했다’는 데서 출발한것이고 결론은 여기에 한줄도 더 보태진 것이 없었다. 실패했다는것이 전제였기 때문에 의혹은 당초부터 빈 상자였다. 이 빈 상자
를 앞에 두고 언론들은 깽깽이를 긁어대며 구경꾼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 관련자들이 유죄선고를 받기는 했으나 사건의 본류와는 전혀 상관없이 증언 과정에서 자신의 창피를 감추
려고 했던 것이 위증의 죄가 되었을 뿐이다.
이 사건에 관한 한 김대중 대통령의 초지(初志)는 옳았다. 언론들이 집중사격을 퍼붓기 시작했을 때 김 대통령은 사안의 무죄성을 간파하고 언론들의 무책임에 격분하며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
자 언론들은 더욱 흥분했고 결국 김 대통령은 언론에 선동된 민심을 달래지 않을수 없어서 장관이 되어있던 전검찰총장을 사퇴시키고 특별검사 임명에 동의함으로써 굴복했다. 언론들은 승리자
처럼 의기양양했다.(<월간조선> 2002. 12월호 김성우)

DJ정권의 심장부, 박주선을 겨냥하라
옷로비 사건이 열기를 더해가던 8월 초.한나라당 이회창의‘세풍자금 은닉설’이 나왔다. 세풍자금 중 일부
를 빼돌려 보관 중이라는 혐의가 검찰수사 과정에서 포착된 것이다.
불법비리 혐의에 대한 한나라당의 18번은‘야당 분열’과‘이회창 죽이기’로 정쟁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회창의 한 측근은 수사가“박주선 비서관이 주도하는 청와대 사직동팀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고 공격
의 화살을 박주선에게 돌렸다.
한나라당의‘박주선 죽이기’가 본격화되는 신호탄이었다. 세풍사건수사와 박주선은 관계가 없었다. 앞에서 밝혔듯 검찰 수사에 대해 박주선이 중간보고를 받거나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세풍자금 은닉 역시 검
찰의 독자적 수사였다.
그러나 이미 정치인 사정을 정쟁화해 재미를 본 한나라당이었다. 박주선은 정권 초 사정의 칼끝이 정치권을 향할 때부터‘눈엣가시’였다.
정치적 조정과 타협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게임이란 냉혹했다. 옷로비 사건이 터지기 전 정국 상황은 야당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세풍사건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었던것이다. 반DJ정서에 기댄 정치공세로 버티면서 틈새를 노리던 보수
야당과 언론에게 옷로비 사건은 전세 역전의 호기였다.
그들은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을 본 하이에나였다. 쉴 새 없이 공세를퍼부으며 심장부를 노렸다. 단 한 방의 카운터 펀치로 승부가 결정되는 승부수. 이를 위해선 곁가지를 쳐선 안된다. 심장부를 노려야 일거에 전세 역전이 가능했다.

DJ정권을 흔들 지렛대
옷로비 사건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초점은 박주선에게 모아졌다. 내사과정에서의 문제점, DJ에게 축소·허위보고, 보고서 조작과 유출등 온갖 설이 난무했다. 심지어 일부 언론에서는‘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참모’라고 몰아붙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옷로비 실체는‘실패한 로비’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믿었던 특검마저‘옷로비는 3류 신파극’이라고 수사진행과정에서 밝혔다. 야당과 언론으로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낸 것이 수사 은폐 축소, 보고서 유출이었다. 박주선의 사직동팀이 검찰총장을 봐주기 위한 수사를 했고, 대통령에게
이를 은폐축소했으며, 보고서를 김태정에게 유출했다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대통령에 대한 보고서 작성, 내사보고서를 검찰총장이었던 김태정에게 주면서‘부인의 행동에 주의를 준 것’을 이렇게 왜곡했다.
이 역시 마녀사냥의 광풍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조작극이었다. 재판부에선 박주선에 대해“옷로비 의혹 사건에 대해 원칙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DJ에 대한 보고, 김태정에게 보
낸 보고서 등이 모두 공직자로서 정상적인 업무 절차였음이 확인됐다.
이때 부인 연정희가 사직통팀의 조사를 받았던 김태정은 박주선에대해 공공연하게‘괘씸한 놈’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조사 당시, 검찰총장인 자신에게 내용을 알리지도 않고, 연정희를 밤늦게까지 조사
한 데 대한 불만 토로였다.
DJ정부 이전 정권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한 인사는 박주선의 일처리에 대해“사정 책임자의 정상적인 업무처리였다. 이런 일로 기소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DJ는 단호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느냐”고 박주선에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표명했다.
하지만 약점을 본 야당과 언론은 선선히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DJ가 보호하면 보호할수록 그들의 광기는 정도를 더해갔다. ‘민심과동떨어져 있다’, ‘오만하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옷로비 의혹 사건은 이제 더 이상 몇 명 여인들이 등장해 저지른‘미수사기극’수준에 머물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사건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문제 이전에 그것을 단순 소극(笑劇) 차원으로 성격규정을 한 당초의 수사과정 자체가 새로운 심판의 대상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반코트 배달시점과 반환시점의 조작 의혹 등 최병모 특별검사팀이 밝혀내고 있는 새로운 사실과 물증들은 이 사건을 사실상 원점에서부터 다시 접근하게 만들고 있다.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 휘하의 대통령 특명수사기관‘사직동 팀’의 최초 내사에는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이를 이어받은 검찰수사는 또 어떠했는지 등 모든 의혹에 대한 철저한 재검증
과 규명이 시급하다.(<조선일보> 1999. 11. 19 사설)

언론은 연일‘청와대 사정팀 뭘 내사했냐’며 박주선에 대한 공세를강화했다. ‘박주선이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줄이고 숨겼는지를 밝히는것’이 사건의 실체로 변해갔다.
한나라당 역시 박주선 해임에서 사법처리로 공세의 강도를 높여갔다.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이부영은“사직동팀이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하고도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축소·은폐 의혹이 있다”며 박주선
을 겨냥했다.
이부영은 이회창 정권재탈환 작전의 핵심인사였다. 이부영은“연정희 뒤에는 김태정 전검찰총장이 있고 그 뒤에 박주선이 있고, 그 뒤엔이 세상에서 최고 가는 거짓말쟁이가 있다”고 공격했다. 최고 가는 거
짓말쟁이는 DJ를 가리킨다.
사무총장인 하순봉은“박주선을 특검을 방해한 혐의로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 언론은“한나라당이 박주선의 옷을 벗기기로작심한 것 같다”고 한나라당의 공세의도와 수위를 보도했다.
막바지로 가면서 박주선을 DJ정권에서 빼는 세력구도 재편과 DJ정권 약화가 그 의도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박주선이 옷사건과 관련, 구속된 것은 12월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언론에선 11월부터 사법처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박주선은 대통령의 두둑한 신임을 받고 있었고 그 업무에 있어서정권의 초석을 놓고 있었다. 반DJ 세력에게는‘눈엣가시’이자 DJ정권을 흔들 지렛대였다.
생각해보라. 어떤 조직에서건 충성스런 구성원이 경쟁진영의 무고와 이간질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과연 그 조직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특히 국민의 정부는 약체정권이었다. 버팀목은 도덕성과 신
뢰, 국민의 지지였다. 그리고 강력한 개혁의지로 무장한 주체세력이필수였다.
한나라당은 박주선에게 깊은 원한이 있었다. 대선에서의 마지막 승부수‘DJ 비자금 사건’수사 유보를 결정한 주체 중 한 사람이기도했다.
DJ의 박주선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박주선 개인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지만, ‘한번 밀리면 영원히 밀린다’는 권력게임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당과 언론의 공세는 너무나 집요했고, 너무나 강했다. 더구나 이 앞에서 보호막을 형성했어야 할 여권은 너무나 무력했다. 아니 이들은 권력의 생리와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내주고 이쯤에서 끝내자는 순진한 발상을 하고 있었다. 마침 박주선은 그들에겐 썩 달가운 존재도 아니지 않는가.
DJ는 시종일관‘법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정면돌파를 주장했다. 그러나 여당은 달랐다.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어서라도사건을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2000년 4월 총선이 눈앞이었다. 여당은
박주선이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야당과 언론, 보수세력과의 대결에서세력균형점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점차 여야 정치세력은 각자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박주선을희생양으로 몰아갔다. 정치권력의 음모 앞에 박주선은 검찰에 출두하면서‘박주선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저는 4천억 원이 넘는 국민의 재산을 편취하고 해외로 빼돌린‘부도덕한 재벌’총수의 죄악을 밝혀 단죄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부도덕한재벌이 꾸민 거대한 음모의 덫에 걸렸음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단죄하려 했는지에 대한 사회적 착시현상에 망연해할 따름입니다. 할말은 많으나 진실을 외면 당하는 억울함에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몸을 떨기도 했습
니다.
무엇보다 반개혁·기득권 세력의 온갖 저항과 방해 속에서도 IMF국난을 극복하고 개혁의 대장정을 이끌고 계시는 대통령님의 업적과성과가 이 문제로 퇴색되고 희석되는 현실에 죄송함을 가눌 길이 없습
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역사와 시대가 제물을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열과 성을 다해 모셨던 대통령님과 국민의 정부를 위해서라면 이제한 몸 당당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제가 믿는 역사의 신이 진실을 밝혀줄 것입니다.”

여론에 놀아난 검찰과 시민단체
박주선의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검찰 내에선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다. 고위간부들이 검찰총장 방에 모여 4시간 30분간 격론을 벌였다.
검찰총장이었던 박순용, 검사장급 간부 7명, 서울고검장, 서울지검장등 11명이 모였다. 문을 걸어잠그고 사법처리 여부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밖에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 사이에선“교황선출 회의하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날 회의는 규정에 없는 것이었다. 임의적인 대책모임이라고 할 수있다. 이 자리에서 구속 여부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고편법이었다.
검찰 고위간부들이 규정에도 없는 회의체를 만들어 박주선에 대해논의한 것은 결정에 따른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법률적으론죄가 안된다. 그런데 국민여론이 무섭다.’이 딜레마를 해결해야 했다.
결단을 내려야 했고 그에 따른 여론과 정치적 책임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여앉은 것이다.

여론에 굴복한 검찰 수뇌부
당시 검찰 안팎의 합리적인 해결 방안은‘법률과 정치적 책임 분리론’이었다.
먼저 박주선에 대해선‘최선을 다해 수사했지만 법률상 범죄가 성립되지 않아 사법처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다음으로 국민여론과 정서를 고려, 검찰총장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 정치적
인 책임을 지는 모양새를 취하는 게 최선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래야 검찰이 정치적 외압 뿐 아니라 여론에 따라 법의 잣대가 춤추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국민여론에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검찰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검찰이 책임지
고 나섰을 때 대통령이 검찰총장 사표를 수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직무상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 수뇌부는 이같은 소신과 결단을 위한 배짱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길을택했다.
당시 수사를 했던 박 만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박주선씨가 우리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당시 온나라가 시끄러운데 어떻게 합니까. 본인은 최초 문건에 대해 안 주었다고 하지만
두 번째 문건은 주었다고 했어요. 두 번째 문건을 준 것으로 봐서는그간의 정황을 볼 때 첫 번째 것도 갔다고 보는 거죠. 우리가 그 사건을 인지하고 수사한 것도 아니고, 박주선 비서관과 김태정 장관
두 사람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고, 특검이 등장하고 우리도죽지 못해 나선 것인데 그것을 비난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이미 장관을 구속했는데 (박주선씨를) 어떻게 불구속하느냐’는 입장이었습니다.(<월간 조선> 2005. 5월호)
박주선의 구속 기소의 이유는 여론의 악화였다. 증거주의라는 수사의 기본은 지켜지지 않았다.
박주선의 사법처리를 주장했던 측은 결정적인‘물증이 없더라도 정황증거상 혐의’를 주장하며 사법처리를 주장했다. 증거주의를 스스로부정한 것이다. 사법처리를 반대한 측은‘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영장이 기각될 것’이라며‘국민여론에 검찰이 춤춰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저울추를 기울게 한 것은 당시 대검 수사기획관이었던 이종왕의 사표였다. 이종왕은 박주선 검찰 소환을 앞두고“물증은 충분히 갖췄다”“기소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사를
하기 전 이미 사법처리 방침을 결정해놓고 있었다.
박주선 구속을 주도했던 당시 수사라인은 이종왕 - 박 만이었다.
이종왕은 경북 경산 출신으로 경북고를 나왔고, 박 만은 경북 구미 출신으로 TK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종왕은 사법처리 불가론이 우세해지자 사표를 던져 분위기를 구속쪽으로 몰아갔다. 이종왕의 사표는 박주선에 대한 검찰의 판단에마치 권력외압이 작용하는 것인 양 만들었다.
검찰 수뇌부는 마침내 국민여론에 굴복했다. 박주선에 대해 영장을청구했다. 박주선은“검찰이 무혐의 사안을 여론의 눈치를 보며 영장을 청구했다”며“대통령께 보고된 문건을 사인이 아닌 공무원인 김태
정 전장관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건넨 것은 업무상 비밀누설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지만 묻혀버렸다.
검찰의 영장청구도 장시간이 걸렸지만 법원의 영장 발부도 9시간이 넘는 장고 끝에 나왔다. 법률적 판단에 그만큼 확신이 없었지만 여론에 떠밀려갔다.
박주선의 변호인단에 참여한 변호사 수는 80여 명. 모두 무료변론을자청했다. 개인 변호인단 규모로는 사상 최대였다. 박주선의 신망을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법조계의 분노 표시였다. 말도 안되는 사건에
대한‘법조계의 집단항의시위’인 셈이다.
진실은 오래가지 않아 드러났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노무현은‘미래로 가기 위한 분열과 불신의 원인을 치유하기 위해’과거사 정리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과거사 정리의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 어느 곳보다 과거 영욕이 많았던 곳이 검찰이다. 군사독재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문민정부 이후에도‘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그러나 검찰은 과거사 청산에 가장 소극적이다. 국정원과 군에선 과거사진상규명위를 만들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검찰만이 외면하고 있다.
박주선의 구속과 무죄 역시 검찰이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의 하나다.
옷로비 보도가 언론사의 치욕이었다면 옷로비 사건 수사는 검찰의 오욕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로비는 없었다. 박주선에게 씌워진 은폐조작, 기밀 유출 등의 혐의역시 무죄로 판명됐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은 사과는커녕 어쩔수 없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공권력에 의한 범죄를 단죄할길이 없어진다. 이를 단순화시킨다면 검찰권이라는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
이 된다.

시민단체, 진실 왜곡 커넥션의 종범
여론에 따라 춤을 춘 것은 공권력의 횡포를 감시한다는 시민단체도마찬가지였다. 의혹에 기름을 끼얹고 국민여론을 호도하는 데 단단히한몫했다.
그들에겐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성, 사건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합리적 해결을 위한 노력은 없었다. 이들 역시 국민여론에 영합해 더 크게, 더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데 열중했다. 진실을 거짓
으로 만든 주범은 아니지만 최소한 종범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5월 경실련은“이 사건 처리 태도가 현 정부의 개혁성과 도덕성을가늠하는 기준”이라며“필요하다면 국회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고 청문회를 열어야한다”고 야당의 공세에 힘을 실어줬다.
6월로 넘어가면서 이들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내로라하는 시민단체 113개가 모여 대정부 연대투쟁을 선언했다. “국민의 소리는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으로 무시되고
있어 민심이 현정부를 떠나고 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는 대통령보좌진이 개혁을 망치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거짓이 진실을 억누른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실체 없는 로비로 밝혀졌고, 그로 인해 구속됐던 인사들은 모두 무죄를 받았다. 그들은 여기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 언론인은“지금은 밤의 제왕이 언론사주가 아니라 시민단체”라고 말했다. 사회적 역할이 커
졌고 그만큼 책임도 커졌지만 시민단체를 감시 견제하는 기구는 없다.
시민단체는 박주선이 나라종금 사건, 현대건설 사건에 연루됐을 때에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검찰의 발표만 믿고 박주선을 비리정치인으로 낙인찍고, 체포조를 만드는 등 인권침해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재판 전까지는 무죄 추정이라는 법의 원칙을 떠나 당시는 검찰의 주장과 피의자의 무죄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었다. 검찰의 주장과 기소가 공권력의 남용이었다면 피의자는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가된다. 시민단체가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약자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강자 편, 진실을 억누르는 편에 섰다.
언론이 무책임한 보도로 한번 죽이면 그 뒤를 이어 시민단체가 두번 죽이는 행위를 한 셈이다.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이다.

DJ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되다
집권여당 역시 국민여론에 따라 춤추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악화된 국민여론을 잠재우고, 옷로비 사건의터널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여당 핵심세력은 옷로비 사건이 박주선이라는 한 개인을 내주는 싸움이 아니라, 국민의 정부가 등을 보이느냐 아니냐의 결전이라는 것을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잘못된 판단의 결과는 너무 빨리, 그리고 통
렬하게 다가왔다. DJ정권의 무력화였다.
옷로비 와중에서 김중권 비서실장(11.23)이 물러났고 그전에 정무수석 이강래, 국정원장 이종찬 등이 물러났다. 그 빈자리를 한광옥, 남궁진, 천용택 등 동교동계 인사가 차지했다. 이제 정치논리가 국정을 지
배하기 시작했다.
국정운영에 더 이상 부담을 줄 수 없다고 물러난 박주선에게 한광옥은“최초 보고서를 김태정에게 전했다고 하던데 사실이면 밝히라”며자백을 권했다. 한광옥은 뒷날“그때는 국정이 옷 사건에 발목 잡혀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면서“조속히 옷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인식이 여권 내에 퍼져 있었다”고 말했다. 법적인 판단이 어떻든간에 정치적 차원에서는 누군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박주선의 사퇴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DJ는 만류했다.
박주선이 청와대에서 물러나기 전 DJ에게 사의를 표명했을 때도 그랬다.
박주선은“옷사건의 진상은 보고 드린 대로 은폐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로 국정이 뒤엉켜 있으니 책임져야 하겠습니다. 제가나가면 조용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DJ는“법적으로 책임질일이 없는 데 여론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류했다. “장수가 최
선을 다했어도 전장에서 지면 물러나야 한다”는 박주선의 거듭된 사의에도“좀 두고 보자”고 반려했다. 그러나 한광옥과 남궁 진은 물러나는 게 좋겠다고 사표를 거듭 종용했다. 박주선은 거듭 DJ에게 사의
수리를 간청했고 DJ는 마지못해 사의를 수용했다.
“그럼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인가”라고 물었고 박주선은“검찰로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DJ는“내 당신을 평소 신임한 점을 잊지말라. 곧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후 1달. DJ도 모르는 상황에서 몇몇 실세들에 의해 박주선의구속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시기 동교동계의 대책회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지원이근원지다. 박지원은 당시 주변인사들에게“대통령을 모시다 보면 희생이 있어야 할 때도 있다”며“동교동계 몇 사람이 모여 옷 사건을 끊고
2000년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는 얘기를 했다.
박주선의 사퇴와 뒤이은 구속은 DJ 권력 운영에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여야 간, 정권교체 후 형성됐던 개혁세력 대 보수 기득권세력 간힘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국가기강 확립과 고위층 부정 부패 사정을 담당하는 총괄자의 구속은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이후 DJ정권이 겪어야할 숱한시련의 출발점이었고 사실상 레임덕의 시작이었다.
약세를 스스로 인정한 권력을 향한 야권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까지 야당의 공세에 내주는데 거칠 것이없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여권 내 권력 구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박주선의낙마는 소위 신주류 퇴진과 동교동계의 전면 포진을 의미했다. 청와대에는 한광옥, 남궁진, 당에는 김옥두, 정균환이 전면에 등장했다.

원은 천용택을 원장으로 그 밑에 엄익준, 김은성 등이 포진했다. 이들역시 동교동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리고 권노갑이 본인 불출마를 무기로 2000년 4·13총선 물갈이와 교통정리를 맡으면서‘제2인자’로서 또다른‘권부’의 역할을 하기시작했다. 단맛을 노린 세력들은 권노갑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권력운영이 엄정한 검증 절차를 가진‘공적’분야에서 연고와 친분이 좌우하는‘비선조직’으로 넘어간 것이다.
견제와 균형은 사라졌다. 실세들의 독주체제였다. 이는 곧 각종 비리게이트에 대한 사전 차단장치의 실종이었고, DJ정권을 몰락시킨원인이 됐다.
옷로비 사건의 결과는 박주선 한 사람을 내준 것이 아니었다. 세력의 균형점이 무너진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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